진주향교

역사 2015. 5. 31. 21:14

진주향교(晉州鄕校)

 

향교는 유교의 옛 성현을 받들고, 지역 사회의 인재 양성과 미풍양속을 장려할 목적으로 설립된 지방의 교육기관이다. 향교의 역할은 교육과 제례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으며, 유생이 학문을 연마하는 명륜당과 일상 생활을 하는 기숙사 역할을 하던 동, 서재에서는 교육 기능을 담당하고, 공자와 저명한 유학자를 모시는 대성전 및 동·서무는 제례기능을 각각 담당하고 있다. 진주는 옥봉동 232-1(향교로 99-3)번지에 위치해 있으며 1972212일에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50호로 지정되었다.

 

진주향교(晋州鄕校)의 창건연대는 확실치 않으나 신라 소성왕 원년(799)에 지금의 진주(晋州)인 청주(菁州)의 노거현(老居縣)을 국학(國學)의 학생녹읍(學生祿邑)으로 했다고 한 것으로 보아 학교는 통일신라시대 때부터 운영된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 세종조 영의정 하연(河演)의 글로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수록된 사교당기문(四敎堂記文)에 의하면 고려 현종때 인물인 은열공 강민첨장군이 이곳에서 공부하였다고 한 것으로 보아 진주향교는 고려 초에 설립되었음을 알 수 있다.

 

각종 문헌자료를 종합하면, 고려 성종 6(987)에 향학당(鄕學堂)으로 창건되어 국학감(國學監)으로부터 경학(經學) 및 의학박사(醫學搏士)를 파견 수강토록 하였으며 현재의 의곡사 계곡에 위치하였다.

 

고려 현종 2(1011)에 중수 및 서재(書齋)를 중건하고 수학원(修學院), 학사(學舍), 서재(書齋), 사교학당(四敎學堂) 등으로 개칭되었으며, 조선 태조(朝鮮 太祖) 7(1398)에 문묘(文廟)를 창건하고 향교로서 면모를 갖추었으며, 훈도(訓導), 교관(敎官), 교수(敎授) 등이 성균관(成均館)으로부터 파견되었다.

 

조선 명종 13(1558)에 현 위치로 이건 하였으며 목사(牧使) 김홍이 대대적으로 중수하였다. 조선 선조 25(1592)에 임진왜란으로 인하여 소실(燒失)되었고 조선 선조 36(1603)에 병사(兵使) 이수일이 문묘(文廟)를 중건하여 1607(丁未年)에 병사(兵使) 김태허가 명륜당(明倫堂), (서재(西齋)를 중건하였다. 그 후 수차례 중수하였으며, 1962년에 강학공간(講學空間)인 명륜당(明倫堂), 동재(東齋), 서재(西齋)를 인접한 위치에서 현 위치로 이건하였고 제사공간(祭祀空間)의 출입문인 삼문(三門)은 현 위치의 대성전(大成殿) 앞마당으로 이건하고 풍화루(風化樓)를 삼문(三門)이 있었던 위치에 이건하였다. 명륜당(明倫堂)은 이건할 때에 정면 5칸에서 4칸으로 축소되었고 사교당(四敎堂)1986년에 중건되었다.

 

조선시대에는 국가에서 토지와 노비·책 등을 지급받아 학생들을 가르쳤으나, 갑오개혁(1894) 이후 교육기능은 없어지고 제사기능만 남아있다.

 

[건물구성]

 

대성전·명륜당·동무·서무·내삼문·동재·서재·사교당·풍화루 등 9동의 건물이 있다. 동서방향의 급경사지에 위치하고 있으며, 명륜당을 비롯한 교육공간이 앞에 있고 대성전을 중심으로 하는 제사공간이 뒤에 위치한 전학후묘(前學後廟)로 대성전을 중심으로 하여 건물들이 일직선 위에 대칭으로 배치되어 있다. 문묘는 대성전을 중심으로 양쪽에 동무·서무가 있고, 내삼문이 대성전 중심축에 배치되어 있다. 사교당은 명륜당이 중심에서 동쪽으로 치우쳐 있고 동재와 서재는 대성전을 중심으로 마주보고 있다.

 

대성전은 정면 3·옆면 2칸의 규모이며, 지붕 옆면이 여덟 팔()자 모양인 팔작지붕집으로 대성전으로는 보기 드문 지붕형태인데 팔작지붕 5량 구조로 전퇴(前退)를 두고 개방하였다. 동무·서무는 각각 정면 3, 측면 2칸의 맞배지붕 5량 구조로 되어 있으며, 정면 3칸이 쌍여닫이 띠살문이다. 내삼문은 정면 3, 측면 1칸의 맞배지붕 솟을삼문이다.

 

명륜당은 정면 4칸규모이며, 지붕 옆면이 사람 인()자 모양인 맞배지붕 5량 구조이며, 원래는 5칸이었던 것을 옮겨 지을 때 1칸을 줄인 것으로 보인다. 동재, 서재는 각각 정면 3, 측면 1.5칸의 맞배지붕 3량 구조이다. 풍화루는 정면 3, 측면 2칸의 팔작지붕 누각으로 누마루에 계자난간을 둘렀다. 사교당은 정면 4, 측면 1칸의 맞배지붕 3량 구조로 바닥은 마루를 깔았고 벽면 없이 전부 개방되었다.

 

중수 과정에서 많은 변형이 일어났는데, 특징적인 것은 교육 공간이 명륜당 이외에도 사교당을 배치함으로써 두 개의 명륜당이 중앙의 통로에 의해 좌우로 배치된 것 같은 느낌을 준다. 대성전의 영역이 너무 넓고 지대가 높아서 아래의 명륜당 영역이 왜소하게 보일 정도이며, 대성전의 내삼문 역시 너무 들어와 있어서 동·서무 사이를 가로 막고 있다.

 

연혁

987 고려성종6년에 창건 향학당으로 국학감에서 경학급의학박사를 파견수강

1011 고려현종2년에 중수급서재중건하고 수학 학사 서재를 사교학당으로 개칭

1398 조선태조에 문묘를 창건하고 향교로서 성균관으로부터 훈도교관 교수등 파견배치

1449 세종31년에 사교당 창건

1558 조선 명종13년에 비봉곡으로 이 건

1592 조선 선조25년에 임란으로 인하여 회진.

1603 선조36년에 구기인 현하대에 이건복원

1644 조선 인조22년에 현 위치 상대 중건(문묘).

1811 조선 순조11년에 중수 .

1907 조선순종1년에 중수

1910 경술국치부터 광복까지 항일독립운동기간중 일제탄압으로 전향의 명맥만 유지.

일제치하 6.25동란등으로 퇴락, 전적, 기물 일체일실.

1962년 명륜당, 풍화루 현위 치로 이건.

1971년 문묘급 원장 축대 대보수.

1972년 지방문화재 제50호로 지정.

1979년 동서재 중건.

1984년 명륜당 중수.

1985년 중수.

1986년 사교당 복원.

1992년 대성전 , 명륜당, 동서재를 보수급개수 개수.

1993년 명륜당 대보수. 영남향교사적, 대소인원개하마비문을 개수.

2004년 여성 유도회 결성. 충효교육원 유림회관 창건.

2005년 충효교육원 개원, 사단법인 범국민 예의실천 운동진주지부 결성, 대성전 서편 동량 대체등 대보수

2007년 청년유도회 결성.

2008년 시범향교지정.

 

자료이용자 참고사항

1.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관광공사의 설명은 고려 말 조선 초 경 현유(賢儒)의 위패를 봉안, 배향하고 지방민의 교육과 교화를 위하여 창건되었다.”라는 엉터리 설명으로 시작해서 토시하나 안틀림.

2. 향교의 역사, 역할 등에 대해서는 진주향교 홈페이지를 참조.

3. 진주시청의 자료가 가장 무난하며 자료에 인터넷 자료 중 오류도 있으니 확인바람.

4. 수행평가 학생들을 위해 떠도는 자료들을 재정리한 것임.

 

참고자료

진주역사(진주역사를 찾아서13), 김해영, 2010, 문화고을

진주향교, 디지털진주문화대전 http://jinju.grandculture.net

진주향교 홈페이지 http://www.jinjuhg.kr/

진주시청 http://tour.jinju.go.kr/01tour/SIGHT005.jsp?amode=_viw&cult_sno=468&cpage=1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100.daum.net/encyclopedia/view/14XXE0054928

한국관광공사 http://100.daum.net/encyclopedia/view/52XXX1955442

다음문화유산 http://heritage.daum.net/heritage/21595.daum#intro

위키백과

http://ko.wikipedia.org/wiki/%EC%A7%84%EC%A3%BC%ED%96%A5%EA%B5%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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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양호

역사 2015. 5. 30. 23:13

진양호

 

남강댐은 1920~30년대에 실시된 낙동강 개수계획의 일환으로 부산의 홍수피해를 줄이기 위해서 계획되었다. 하절기 집중호우로 발생하는 남강의 홍수량을 사천만으로 방류하기 위한 홍수조절 목적으로 1939년에 시공하였으나, 중단되었다가 1949년에 재착공하여 댐코어를 시공하는 도중 다시 중단되었다. 그 뒤 1962년에 제1차 경제개발5개년계획의 일환으로 홍수조절 외에 관개용수, 상수도용수 공급 및 발전을 포함하는 다목적 댐으로 건설되었다. 76개월의 공사기간을 거쳐 1969107일 준공되었다.

 

낙동강의 지류인 남강을 가로질러 완공한 낙동강 수계 최초의 다목적 댐으로 준공당시 길이 975m, 높이 21m의 중심코어형 필 댐(fill dam)이었다. 당시 진양호의 저수량은 13,600만 톤이었다. 1989년 댐 보강공사가 착공되어 19991220일 보강댐이 준공되어 진양호의 저수량은 39백만톤으로 늘어났으며 남강댐의 높이는 34m, 길이 1,126m, 현재 유역면적은 2,285이다. 기타 부대시설을 포함한 전체 보강 사업 준공도 200012월 완공되었다. 이로써 홍수조절과 생활 및 공업용수 공급은 물론 연간발전량은 4,000kw에서 4,130kw로 늘어났다.

 

남강댐 보강공사로 수몰된 지역은 진주, 사천, 산청에 걸쳐있으며 수몰된 가구는 1,641가구이며 수몰민은 6,698명이다. 진주시는 판문동, 귀곡동, 대평면, 명석면, 내동면, 수곡면 등 6개 동·면에 총 4814천 제곱미터가 수몰되었고 총 971가구, 3,530명이 이주 되었다.

 

주요 시설물로는 남강댐으로서 초당 1570의 계획 홍수량을 조절, 방류하기 위하여 문비 6문을 보유하는 여수로 시설과 홍수 때 사천만으로 방류를 위한 문비 10문을 보유하는 제수언 시설, 연장 11에 달하는 방수로 시설, 시설 용량 14kw의 발전소 시설이 있다. 남강댐 유역을 중심으로 52.623가 상수원보호구역으로 지정되어 있으며, 이 가운데 진양호상수원보호구역은 28.065에 이른다.

 

진주시 판문동과 내동면·대평면에 걸쳐 조성된 진양호는 경상남도 내 3개군 9개면에 걸쳐 있다. 주변에 약 2,000그루의 벚나무가 심어져 있어 봄 벚꽃 놀이가 펼쳐지고, 호수 주변 방풍림과 섬이 잘 어우러져 자연경관 또한 빼어나다.

 

수려한 자연 경관과 어우러진 진양호는 진주시민 및 서부 경남인들의 휴식공간으로 많은 사랑을 받고 있으며, 주변에는 우약정, 남인수 동상, 전통예술회관, 동물원, 진주랜드, 가족쉼터, 일년계단, 이재호 노래비 휴게전망대, 물 홍보관, 아시아 레이크사이드 호텔, 여관, 식당 등의 위락 시설을 갖추고 있다. 진양호 노을은 진주8경 중 하나이다.

 

자료 이용시 유의사항

1. 백과사전류는 1970년 완공, 관공서들은 1969년 완공으로 표시

2. 진양호 보강공사 이전 정보를 게재한 곳이 있으며 보강공사 이전, 이후 정보가 혼재된 곳도 있다.

3. 남강댐관리단의 정보를 기초로 했다.

4. 동네 학생들 수행평가용으로 돌아다니는 자료들을 재조합 정리했다.

 

참고자료

진주팔경(진주문화를 찾아서 8), 강희근, 2007, 지식산업사.

진주시청 홈페이지 진양호 http://tour.jinju.go.kr/01tour/SIGHT002.jsp

남강댐관리단 블로그 http://blog.naver.com/kwaternam

남강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100.daum.net/encyclopedia/view/14XXE0011756

진양호, 경남관광길잡이 http://www.gntour.com

진양호, 한국관광공사 http://100.daum.net/encyclopedia/view/52XXXX126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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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개제

역사 2015. 5. 20. 12:35

논개제

 

논개영정 - 논개사이버박물관

 

522일부터 24일까지 진주성 일원에서 논개제가 열린다. 논개제는 의암별제진주탈춤한마당을 주축으로 만들어진 봄축제이다. 진주탈춤한마당은 올 해 18회째 열리는 행사이며 의암별제는 1868년 진주목사 정현석이, 임진왜란 이후 진주기생들이 지내고 있던 논개제사를 정리하여 국가제향으로 만든 것이다. 공식 제례 중 유일하게 여성이 제관을 맡는 제사이며 종묘제례와 춘추제례 외에 음악이 사용되는 유일한 제례이다.

 

논개를 기리는 이 제사는 1651년에 이미 연례행사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오두인의 기록에 따르면 매년 629(음력), 진주성이 함락되던 날, 진주 사람들은 강가에 제단을 만들고 의로운 넋에 제사를 올렸다. 민중들이 자신들의 천하디 천한 딸을 기억하기 위해 지내던 이 제사는 천한 기생이 의기가 되고 의기사가 만들어져 국가에서 봄, 가을에 정식제사를 올리게 된 이후에도 계속 됐다. 일본에 의해 강제합병된 이후, 국가에서 주관하던 제사는 진주권번의 기생들이 다시 지내게 되었고 진주 기생들은 이 제사를 위해 전국의 예술가들을 진주로 불러들였다.

 

광복 후 논개 제사를 본, 시인 정지용은 호화 삼엄한 예술제”, “어린 기녀들이 논개제에서부터 배우고 체득하는 서럽고도 아름다운 전통이라 표현했다.

 

 

의암별제 - 논개사이버박물관

 

호화 삼엄한 예술제는 임진왜란 이후 진주 기생들이 시작했다. 진주 기생들은 논개를 기억하기 위해서 강가에 큰 제단을 쌓았고 아름다운 가무를 추었으며 거지들과 빈농들에게 음식을 나눠줬다.

 

1980년대에도 기생 제삿날이 되면 시내는 공기조차 무거워졌었고 아이들은 외출을 금지 당했다. 남강가 백사장에서 항상 놀던 철없는 아이는 누구인지 모르는 이상한 아줌마 때문에 모여드는 위험한 사람들이 많다고 부모에게 외출금지를 통보받았다.

 

30년이 지난 지금도 억울하기 짝이 없는 그 소년은, 기생이 뭔지 임진왜란이 뭔지도 몰랐으니 욕을 하고 싶어도 욕을 할 대상이 없어서 죄없는 방바닥만 두들겼다.

 

그 철딱서니 없는 소년에게 논개에 대한 제사가 적어도 400년은 넘었으며 어쩌면 500년도 넘게 계속되어온 행사이며 의로운 죽음을 함께 기억하기 위해 천하고 가난한 자들이 만든 이 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축제였음을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았다.

 

다가오는 주말 아이들과 함께 의로움을 기억하고 죽음을 노래하며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 이야기하며 즐기시길 바랍니다.

 

슬픔을 축제로 만든 곳,

 

진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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