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기생 논개
------------ 참고 사진, 사료들은 다음에 시간나면 올리겠음. 언제 시간날지 모림. --------------------
논개만큼 유명하면서 논개만큼 그 삶을 알 수 없는 역사인물을 찾기도 쉽지 않다. 논개는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으나 그 대부분이 소설에 가깝다. 그녀가 언제 태어나서 몇 살에 죽었으며 그 부모가 누구이며 고향은 어디인지, 어떻게 살았는지 전혀 알 수 없다. 그녀에 대한 증언은 유몽인의 ‘어우야담’에 전언으로 나오는데 그녀의 죽음만을 알 수 있을 뿐이다. 남겨진 자료가 없기 때문에 그녀에 대한 연구는 매우 미흡하다. 그녀에 대한 연구논문보다 그녀에 대한 소설(또는 상상력의 결과물에 대한 연구)이 더 많은 역사인물이 논개이다.
논개에 대한 이야기들 중 대부분이 허구인 상황에 대해서 박노자는 그의 논문 ‘임진왜란과 의기(義妓)전승-전쟁, 도덕, 여성’에서 ‘논개의 신격화’라 표현했다. 박노자가 ‘신격화’라 표현할 만큼 그녀의 삶은 알려진 것이 없으나 그 죽음은 충격적이라 많은 사람들의 상상력을 자극해 왔다. 이 글도 논개의 삶을 명쾌하게 밝힐 수는 없으며 그녀가 죽음을 통해서 표현하려 했던 바를 찾아보려 한다.
논개의 죽음이 진주 외부에 최초로 알려진 것은 유몽인에 의해서다. 유몽인은 임진왜란 당시 세자였던 광해군에 의해 ‘삼도순안어사’(1593년. 충청, 전라, 경상도를 돌아다니며 살피는 어사)로 임명되어 진주에 왔고 이 때 논개의 이야기를 들었다. 유몽인은 논개의 이야기를 “동국신속삼강행실도”(1617년. 충신, 효자, 열녀에 대해 기록한 책)에 넣고자 했으나 관기를 충신이나 열녀 부문에 넣을 수 없다는 반대의견 때문에 국가의 공식 기록에 논개를 넣을 수 없었다. 논개는 ‘음탕한 창기’이기 때문에 국가로부터 외면 받았고 이에 대해 유몽인은 ‘거룩하지 않으면 충성이 아니냐’라고 물으며 그녀의 이야기를 ‘어우야담’(1621년)에 남긴다.
신분이 천한 것들은 숭고할 수 없기에 그 죽음도 국가로부터 인정받지 못하고 ‘야담’이 되었고 후대의 사람들은 그것이 실제로 있었던 일이냐며 반문하거나 ‘신격화’하는 이야기들을 만들어냈다.
유몽인 이후 논개에 대한 기록은 1629년 정대륭이 논개가 순국한 바위를 “의암”이라고 쓴 것과 1651년 오두인이 “의암기”를 쓴 것이 전부다. 논개의 죽음이 다시 논쟁거리가 된 것은 그녀가 죽고 128년이 지난 1721년이다.
1721년 경상우병사로 진주에 부임한 최진한은 진주 사람들의 하소연을 듣고 비변사로 논개를 포상해 달라는 보고를 한다. 이에 비변사는 왕에게 보고하고 이듬해(1722년)에 ‘근거할 만한 기록’을 보내라고 한다. 그러나 130년전에 죽은 천한 기생의 기록은 찾을 수 없었기 때문에 진주사람들은 유몽인의 증언과 유사한 논개에 대한 이야기를 돌에 새겨 올려 보냈다.(의암사적비)
이에 정부는 논개의 죽음이 ‘거룩하다’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이를 보답할 것을 알리며 “자손을 찾아서, 별도로 부역을 면제시켜 주고 이제까지 하지 못했던 나라의 특별한 은전을 보이도록 하라”는 지시를 내린다. 경상우병영은 정부의 지시를 이행하기 위해서 관할하는 관청에 논개의 자손을 찾아보라는 공문을 보내지만 ‘찾을 수 없다’라는 답변만 받았고 이 보고에 대해서 정부는 아무런 답이 없었다. 이때 논개는 공문에 처음으로 ‘음탕한 창기’, ‘관기’가 아닌 ‘의기’로 기록되었으나 그녀는 다시 잊혀졌다. 임금이 바뀌자 최진한은 다시 상소를 올렸지만 이에 대한 영조의 답변은 쌀쌀했다. “처음에 구별을 둔 것에 반드시 까닭이 있었을 터이다. 야담에 적혔으나 어찌 믿을 수 있겠는가? 또 백여 년이나 지난 일이라 가볍게 처리할 수 없다.”
‘가볍게’ 바뀔 수 없었던 논개에 대한 영조의 입장이 바뀐 것은 이십년이 다 되어가는 1740년이다. 경상우병사 남덕하가 영조에게 장계를 올려 “의기에게 사당을 세워 포상하기를 청하여 마침내 허락”을 받았다. 논개는 죽은 지 147년만에 국가로부터 그 공적을 인정을 받았다. 이를 주도했던 경상우병사 남덕하가 이인좌의 반란을 진압한 일등공신이었기에 가능했다는 주장은 너무도 서글픈 또 다른 역사의 모습이다.
한 세기를 훌쩍 뛰어넘는 그 오랜 시간동안 논개는 잊혀지지 않았을까? 제대로 된 역사기록도 없고 정부도 인정하지 않았고 자식도 일가친척도 없는 그녀는 어떻게 사람들의 기억 속에 남아 있었을까?
논개를 기리는 제사는 1651년에 이미 연례행사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오두인의 기록에 따르면 매년 6월 29일, 진주성이 함락된 날, 진주사람들은 강가에 제단을 만들고 의로운 넋에 제사를 올렸다. 이 제사는 영조대에 의기사가 만들어지고 봄, 가을에 제사를 올리게 된 이후에도 계속 지냈다. 광복 후 논개 제사를 본, 시인 정지용은 “호화 삼엄한 예술제”, “어린 기녀들이 논개제에서부터 배우고 체득하는 서럽고도 아름다운 전통”이라 표현했다.
왜 진주사람들은 침략군 한 명(논개소이영지論介笑而迎之 왜장유이인지倭將誘而引之)을 껴안고 강물에 투신한 “음탕한 창녀”를 수 백년 동안 기억하기 위해서 노력했을까? 임진왜란 때, 진주에서 죽은 “숭고하고 거룩한 자”들이 수십 수백이며 그들보다 덜 숭고하지만 ‘음탕한 창기’보다는 비천하지 않은 수만명의 양민들이 죽었다. 촉석루 앞 남강은 투신 사람들의 시체로 강물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그 많은 사람들 중에 왜 하필 “음탕한 기생 논개”를 수 백년 동안 기억하려 노력했을까?
어떤 사람은 진주사람들의 기억과 유몽인의 기록에 착오가 있었을 수도 있다고 주장한다. 어떤 이들은 꾸며진 것이라 주장한다.
논개에 대한 대부분의 이야기는 꾸며진 것이 맞다. 1722년 공문을 통해서 국가기관을 동원하여 찾아보려 노력을 했으나 등장하지 않았던 그녀의 자손은 1740년 의기로 공식 인정받은 10년 후인 1750년에 처음 등장하게 된다. 이 때 논개는 진주성에 죽은 최경회의 첩이 된다. 논개는 “음탕한 창기”에서 첩실이지만 사대부의 부인으로 신분이 상승한다. 반세기 후에는 고향도 갖게 된다. 1799년 발간된 호남절의록에 장수 사람으로 등장한다. 이후 다시 반세기 정도 지난 1846년 장수현감 정주석은 “촉석의기논개생장향수명비”를 세워 논개의 고향을 장수로 공식화한다. 1872년에는 “장수현읍지”를 통해서 “장수현 임현내면 풍천마을”이 논개의 고향으로 밝혀진다. 그리고 다시 백년이 흘러 1977년 함양군은 “의랑 논개”를 펴내며 함양군 서상면 금당리 방지마을에 논개의 무덤이 있다고 밝힌다.
국가로부터 의기로 인정받은 이후에 등장한 경천동지할 역사발굴의 결과들 덕분에 논개는 천한 기생에서 거룩한 신화가 되었다.
그러나 우리가 논개의 죽음을 이해하기 위해 봐야 할 것은 그녀에 대한 신화가 만들어지 지기 시작한 이후가 아니라 그 앞이다. “의기 논개”가 되기 이전 한 세기가 넘게 진주의 관기들에 의해서 이루어진 그녀의 제사에 대해 생각해 보자.
전태일은 노동자의 인간다운 삶을 보장하라며 죽었지만 전국의 공장 중 그의 기일에 제사는커녕 묵념을 올리는 사업장을 찾아보기 어렵다. 관기(관청에 소속된 기생)는 현재의 노동자들보다 수백배는 더 어려운 처지에 있었고 가장 신분예속이 심했다. “백정은 기생들도 안받는다”라는 말 속에 이 두 신분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어떠했는지 알 수 있다. 변사또가 제일 먼저 한 일이 관기들 확인이었다.(점고)
그러나 논개의 제사는 관기들이 주최했다. 기생들이 기생의 제사를 위해서 강가에 큰 제단을 쌓고 아름다운 가무를 추고 거지들과 빈농들에게 음식을 나눠줬다. 그녀의 죽음이 실제보다 과장된 것이라면 그런 일이 가능했을까? 필자가 초등학교 다니던 1980년대 초반만 해도 6월 29일 “기생 제삿날”이 되면 시내의 공기조차 무거워졌고 외출을 금지 당했다. 남강가에서 항상 놀았던 그 초딩은 누구 인지 모르지만 밖에 놀러 나가지도 못하게 한다고 죽은 사람 욕을 해대며 방바닥에 화풀이를 했다.
2007년 박노자의 논문이 “논개 이야기가 만들어진 것”으로 진주에 알려지고 이에 대응하기 위해 진주의 유력인사들이 모였다. 그 자리에서 나이 지긋하신 진주 사족의 후예는 “우리 어르신들이 할 일이 없서 기생년 이야기나 만들고 다녔을까?”라는 입장을 밝혔다.(당시 필자가 서울에 가서 박노자를 만나 사실 확인을 해야 하는 임무를 맡았기에 그 자리에서 동네 어르신들의 여러 가지 이야기를 경청해야 했다.)
150년만에 국가로부터 죽음을 인정받은 논개의 이야기는 계속 확장되었고 논개가 죽은지 400년이 지났으나 그녀의 이야기는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그녀가 죽은지 400년만에 그녀의 무덤까지 발견되었으니 앞으로 50년, 100년 후에 논개에 대한 새로운 무엇이 발견되더라도 그리 놀라운 것은 아니리라.
지금까지 만들어졌고 앞으로도 꾸준히 만들어질 논개에 대한 수많은 전설과 상상들은 그저 이야기꺼리일 뿐이다. 우리가 소설이 아닌 역사로서 논개에 대해 기억해야 할 것은 임진왜란을 겪었던 진주사람들이 논개의 죽음을 통해서 전달하고자 했던 것이 무엇일까 하는 것이다.
진주를 끝까지 지킬 것이라는 임금을 말을 믿고 7만명의 사람들이 진주성에 들어왔고 학살당했다. 권율이 지휘한 국왕의 군대는 일본군의 병력에 놀라 전라도로 철수했고 명나라의 군대는 일본군과 협상하며 진주를 포기했다. 10만의 침략자들에게 포위된 진주성은 10일을 싸웠으나 하늘조차 진주사람들을 버렸다. 큰 비로 활줄은 늘어지고 성벽은 큰 물살에 흘러내렸다.(1591년에 실시한 부실한 진주성 확장공사 때문에 성벽이 무너졌으나 당시 진주 사람들에게는 하늘이 버린 것으로 이해됐을지도 모른다.) 홍의장군 곽재우는 진주성을 비울 것을 주장하며 입성하지 않았고 방어를 책임진 장수들은 서로 헐뜯기 바빴다. 방어하는 장수들의 문제점을 지적한 늙은 기생은 목이 잘렸다.
참혹한 학살의 현장, 버림받은 자들의 대지에 7만명 중 가장 힘없고 천한 자에 속한 여성이 스스로의 삶을 결정하기 위해서 일어섰다. 일본의 지배자 토요토미 히데요시로부터 ‘진주성에 살아있는 모든 것을 죽이라’는 명령을 받은 학살자의 군대도 그녀가 위암(危巖, 논개 사후 의암義巖)걸어가는 길을 막지 못했다. 국왕의 대리자들로부터 받은 것은 술잔과 멸시와 정액뿐인 그녀가, 유몽인의 주장처럼 국왕에서 충성을 다하기 위한 목적으로 학살자와 함께 죽기 위해서 그 위험천만한 길을 걸어갔을까?
참혹한 전쟁을 겪은 사람들이 전쟁의 교훈을 잊지 않기 위해서 선택한 사람이 그들 중 가장 천한 자, “음탕한 창기 논개”였다. 그들이 왜 그녀를 선택했는지 남아 있는 자료들이 없어서 알 수 없다. 논개는 자신의 죽음을 스스로 선택했다. 그녀의 선택은 인간이 스스로 ‘존엄’을 지키는데 필요한 것은 그의 나이, 직업, 지식, 재산, 신분이 아니라 것을 보여줬다. 논개는 숭고하고 거룩하지 않아도 모든 사람은 존중받을 가치가 있음을 그녀는 자신의 죽음으로 보여줬다.
사회로부터 거룩하고 존귀한 자로 대접받던 자들이 공동체를 앞장서서 지켜야 할 자신들의 임무를 방기하고 적들에게 끌려가 그 대단한 목숨을 연명하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팔 때, 공동체의 가장 미천한 ‘음탕한 창기’는 자신의 삶을 결정했다. 그것이 ‘순국’이라는 이름의 공동체를 위한 행동인지 참혹한 전쟁에 휩쓸려 어쩔 수 없이 선택한 것이든 그녀는 공동체의 적에게 타협하지 않는 결정을 내렸다.
그녀의 이 결정은 300년이 지나 진주 기생 ‘산홍’에게 이어졌다. 을사5적 이지용의 첩이 되어라는 요구에 대해 산홍은 “첩은 비록 하찮은 기생이나 사람 구실을 하며 사는데 어찌 역적의 첩이 되겠습니까?”라고 답했다.
남강위에 떠 있는 의암은 오늘도 우리에게 묻는다.
“너희는 사람 구실을 하고 있느냐?”
* 자료는 김수업의 “논개”(2001, 지식산업사), 진주문화원의 ‘논개사료조견표’를 참조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