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진주성 관련 정보 현황

 

1. 석성건립연도

() 설명없음 : 두산백과

() 1377 : 한민족문화대백과사전

() 1379 : 진주시, 문화재청, daum 문화유산 사전, 위키백과

() 1437 : 브리태니커

 

2. 성둘레 : 내성(1.7km)과 외성(4km)

() 모두 설명 : 두산백과, 위키백과

() 내성만 설명 : 문화재청, daum 문화유산 사전, 진주시청

() 외성만 설명 : 브리태니커, 한민족대백과 사전

 

3. 성넓이

() 168,944: 한국민족문화대백과원

() 173,036: 두산백과, 문화재청

() 171,480: 진주시홈페이지

() 176,804: 진주시 관광안내 책자 및 홍보물

 

4. 정보오류

포털검색 결과

() naver : 지식백과 1088, 블로그 32,176

() daum : 백과사전 3(브리태니커, 위키백과, 문화대백과사전), 블로그 41(1건은 분류오류), 감상평 2

() naver 전수조사 못함. 구글 검색 필요함

 

디지털진주문화대전

() 진주성 관련 내용이 독립항목으로 검색 안됨.

() 검색된 진주성은 같은 이름의 노래에 대한 해설.

() 하위 항목 중에 나오는 진주성 정보 중, 성의 둘레, 넓이 정보 없음.

() 복원사업이 1984년에 마무리되어 현재의 모습 갖춘 것으로 나옴.

() 창열사와 창렬사의 검색내용이 다르며 창렬사로 검색해야 건물의 내력을 알 수 있음. 문화재청과 진주시는 창열사로 되어 있음.

() (5)진주성관련 주요논란 참조

 

daum 문화유산 사전, 지도

() 공사중 공북문 사진

() 문화재 설명에 용다리전설이 포함되어 있음.

() 블로거 리뷰 41(20105월부터~20147) : 1건은 분류 오류, 블로거 주용 내용은 아래와 같음

- 의암가는 길 위험, 진주성 정문 공북문,

- 문화재청 자료에 창렬사로 검색안되고 창열사로 검색됨.

- 창렬사 39위 모심

- 호국의 종 설명없음.

- 유홍준 : 성벽내부는 조선시대 읍성과 다르게 복원되어 있다. 석축은 조선후기에 쌓은 것으로 보인다. 성내 가변쪽 길을 찍고 경남도청 있었던 자리라고 설명함.

 

브리태니커

진주는 고려 말기부터 왜구의 노략질이 심해 방어시설의 보완이 시급했는데 그후 성벽 축조가 시작되어 1437(세종 19)에 성을 새로 쌓아 완성시켰다. 이때에 3개의 못물을 성 북쪽에 모이게 하고, 그 사이에 참호를 파서 적의 접근을 막는 일종의 해자(垓字) 구실을 하게 했다.

-- 임진년 대첩만 설명함.

 

위키백과

() 최경회의 후처이던, 논개도 적장 게야무라 로쿠스케를 껴안고 남강에 투신하여 그 의개를 떨쳤다

() 연혁에서는 “1975년에는 공북문 복원 공사를 마치고, 현재의 모습을 모두 갖추게 되었다.” 훼손과 복원에서는 “2002년 공북문을 복원

() 1896(건양 원년) 8월부터는 경상남도관찰사의 감영이 촉석루 앞에 건립되었다

() 최경회의 첩 논개는 그해 77(칠월 칠석) 촉석루에서 승리를 자축하는 연회를 열기 위해 기생을 소집한다는 방을 보고, 하늘이 주신 설욕의 기회라 생각하고 기녀 행세를 하고 축하연에 들었다.

() 77일 논개부인은 곱게 화장하고 화려한 옷을 입고 열 손가락에 가락지를 끼고 들어갔는데, 전설에 의하면 논개가 열 가락지를 낀 것은 왜장을 껴안되 풀어지지 않게 하려고 했다 한다. 연회에 참석하여 게야무라 로쿠스케 등 일본군 장수들이 술에 크게 취하자 춤을추며 연회장에서 빠져나와 남강이 내려다 보이는 높은 바위로 왜장을 유인해 혼신의 힘을 다해 왜장의 허리를 껴안고 남강으로 투신 자결하였다.

 

한민족문화대백과사전

() 다음해 6월에는 왜군 4만 여명이 진주성을 공격(10만명임)

() 1377년에 다시 돌로 쌓은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2년 뒤에 왜구의 침입으로 무너지자 우왕 6(1380)에 다시 쌓아 완공되었다.

() 진주성은 고려 말 이후 조선시대에 여러 차례 고쳐 쌓았던 축성 방법의 변천 과정을 살필 수 있는 중요한 유적이다. 또한 임진왜란의 산 역사를 담고 있는 성으로, 당시의 무기, 화약 등 국방사 연구에 필요한 자료를 갖춘 성으로 알려져 있다.(여러 차례 고쳐 쌓았으나 남아 있는 자료가 없어서 축성 방법을 알 수 없음)

 

진주성 안내문

() 김시민 : 적탄에 맞고 경상우도병마절도사에 임명된 후 진주성에 순절함(김시민은 순절 후 고향으로 시신 운구 중 경상우도병마절도사 임명장 받음, 김시민은 죽기 전에 자신이 임명된 사실을 몰랐음. 오해의 소지가 있음.)

 

 

5. 진주성 관련 주요 논란

 

() 논개

진주문화대전을 비롯한 여러 곳에 논개가 장수에서 태어났고 본관이 신안이며 씨이고 김천일의 첩(또는 정실부인)이라는 주장이 있다. 이는 모두 허구이다. 김수업 교수님이 작성하신 글 외에 대전의 다른 글들은 신뢰하기 힘든 것들이 많다. 따라서 그녀의 신상에 대해 거론하면 문제가 된다.

 

() 진주성

석성 건립연도, 증축문제 등이 주요논란거리이다.

진주문화대전에는 “1930년대 많이 허물어졌다라는 내용이 있으나 1910년 경남일보의 보도에 따르면 1910년대에 일본이 경술국치 후에 바로 외성을 허물어 대사지를 메웠다. 따라서 1930년대에 허물어진 것은 내성을 말한다.

 

() 삼장사

진주문화대전의 촉석루중삼장사기실비에서는 삼장사를 김성일, 조종도 이로라 적혀있고 삼절사와 다르다고 나와 있다. 진주문화대전의 고종후편에서는 김천일, 최경회, 고종후를 삼장사 칭하고 있다. 일각에서는 김천일(도절제사), 최경회(경상우병사), 황진(충청병사)’으로 보기도 한다.

 

() 충민사

진주의 충민사는 철거되어 없는데 고종후, 김시민 등이 배향되어 있는 것으로 나온다. 충민사는 김시민을 배향하기 위한 곳이다. 김시민, 고종후 등은 창렬사에 배향되어 있다. naver에는 충민사로 검색하면 김시민장군 충민사가 지도에 나오는데 충북 괴산에 있으며 19761221일 충청북도기념물 제12호로 지정되었다.

 

() 산홍

이지용이 자신의 첩이 되어 달라는 요청을 거부한 산홍을 때렸다라는 기사가 나오는데 그 뒤 죽음에 대한 이야기는 논란거리다. 자결했다는 이야기도 있고(진주문화대전 강동욱) 이지용에게 맞아 죽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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