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에 해당되는 글 10건

  1. 2015.08.23 진주시 근대문화유적 조사대상자 - 친일부일혐의자 2
  2. 2015.07.06 강덕경과 진주의 정신대할머니
  3. 2015.06.01 진주성
  4. 2015.06.01 진주성 관련 정보 현황
  5. 2015.05.31 진주향교 2
  6. 2015.05.30 진양호
  7. 2015.05.20 논개제
  8. 2015.05.01 진주연표
  9. 2014.09.08 한반도에서 1972년 체제
  10. 2014.09.03 진주기생 논개

진주시 근대문화유적 조사대상 일람표

 

1. 친일·부일 혐의자 비석

연번

성명

소재지

제작연도

주요내용

비고

1

이종열

(李宗烈)

진주성내

1935

기념비, 평거구장으로 20여 년간 업적 기념

39

2

정봉욱

진주성내

1919

기념비, 면장으로 면민들에게 베푼 것을 기념

40

3

진주성내

1920

불망비, 내동면장으로 치적 기림, 평거면 신안리에서 옮김

45

4

평거동 평거주공@

1920

불망비, 동면장의 주민구휼 기념

134

5

내동면 삼계리

1919

기념비, 나동면장 2년동안 노인공양, 세금 감면

197

6

내동면 삼계리

1930

시혜비, 면장, 우물을 팜

198

7

내동면 삼계리

1919

불망비, 나동면장, 유수리 노인들을 봉양

199

8

내동면 삼계리

1919

불망비, 나동면장, 독산리 빈민을 보살핌

200

9

내동면 삼계리

1919

자혜비, 나동면장, 신율리 주민을 구제, 세금을 내줌

201

10

내동면 독산리 면사무소 앞

1930

송덕비, 나동면장, 소작인에게 우물을 파줌

205

11

정승주

진주성내

1938

기념비, 평거면장 8년 재임 치적을 기념하여 평거면민이 세움

41

12

이종열

(李鐘烈)

진주성내

1937

송덕비, 보도원 이종열의 덕을 칭송

42

13

김종백

진주성내

일제시대

자혜비, 전면장으로 도로 건설 출연 및 자선기념

44

14

정상진

진주성내

1916

불망비, 호세대납, 평거면민 세움.

46, 비봉루 건립

15

상봉서동 887-1

1918

송덕비, 이웃과 소작인을 구제,

83

16

명석면 용산리 수시마을

1930

불망비, 위원, 주민들에게 은덕

584

17

서병문

상대동 645

일제시대

불망비, 면장으로 주민구휼

101

18

오순근

상대동

1923

혜청비, 도동면장의 공정함과 은혜를 기념

107

연번

성명

소재지

제작연도

주요내용

비고

19

옥전

장재동 436-5

1942

애국부인회 부장 옥전의 자선을 기념

124

20

정기엽

이현동 덕산@입구

일제시대

송덕비, 이현구장으로 재임시절 공적기념

137

21

김사만

이현동 북부주유소 옆

일제시대

송덕비, 유곡리구장으로 직무를 성실히 수행

140

22

최응제

판문동 중촌부락

1940

공덕비, 서기를 역임

144

23

김순준

유곡동 각한마을

일제시대

기적비, 지도원을 역임

149

24

김경호

문산읍 삼곡리 원당마을

1927

공덕비, 문산면장으로 학교설립, 도로 수축, 시장 확장 등

178

25

임학주

내동면 삼계리

1933

송덕비, 순사9년을 근무하며 신율리 주민들을 잘 계도함.

196

26

김용진

내동면 독산리 면사무소 앞

1938

송덕비, 나동면장, 학교, 위생, 통신시설을 갖추는데 주도적 역할

204

27

김기태

내동면 독산리 면사무소 앞

1930

불망비, 중추원 참의, 독산리 주민을 구휼

206

28

금곡면 인담리 상인담

1919

불망비, 주사, 소작인의 지세를 부담

241

29

진성면 상촌리 예음마을

1930

불망비, 중추원 참의, 소작료 경감, 세금대납, 구휼

270

30

금산면 용아리 금호지 둑 밑

1919

불망비, 주사, 지역에 공덕을 베품

490

31

최연종

사봉면 우곡마을

일제시대

표선비, 사봉면장, 조세감면, 면민에게 봉사

386

32

구정서

지수면 승산리

1929

불망비, 지수면장, 제방쌓기, 농민계도.

405

33

장인숙

대곡면 월아리

1941

기념비, 구장, 빈민 구휼

438

34

조병찬

금산면 용아리 금호지 둑 밑

1932

기념비, 금산면장(1918), 교육, 산업, 도로확장, 금호지보수에 대한 공로

489

35

백상기

집현면 대암리

1940

기념비, 대암구장으로 일한 것을 기념

530

36

김용선

집현면 장흥리 서원동 795

1934

기념비, 집현면장, 덕행

542

37

강위정

미천면 오방리

1938

청정비, 면장, 폐단시정, 교육과 교통 편리

566

38

김용집

미천면 오방리

1927

기념비, 12년간 면장재임, 학교설립 등 치적

567

39

김성호

명석면 가화리 산막골

1925

불망비, 20년간 구장, 직무선행과 구민을 안민한 공적, 가화 서현동 늑시골에서 이전

603

 

 

2. 확인 조사 필요한 비석

연번

성명

소재지

제작연도

주요내용

비고

1

남평문씨

진주성내

1917

불망비, 장재리 주민에게 은덕

27

2

문덕오

진주성내

1929

선덕비, 남평문씨의 선덕을 기림, 판문동소작인 설림

32

3

남평문씨

봉래초등학교

일제시대

기념비, 봉양학교 설립에 거금을 출연을 기념

85

4

남평문씨

장재동 164

1927

불망비, 통정대부 이규복과 그의 처가 소작인들에게 베푼 혜택을 기념하여 소작인이 설립

통정대부 정3품으로 숙부인, 정부인은 종2품의 처에게 내림. 착오에 의한 동일인 가능성 있음.

131

5

경주정씨

진주성내

일제시대

기념비, 자선

28

6

김해김씨

진주성내

일제시대

불망비, 박준근의 처, 초전동민 설립

29

7

정태석

진주성내

일제시대

기념비, 평거면민 설립

30

8

박응선

진주성내

일제시대

불망비, 가난한 사람들에게 은혜

31

9

박인이

진주성내

일제시대

불망비, 초전리민의 세금대납을 기리기 위해 초전리민이 세움

43

10

정기택

진주성내

1888

불망비, 병마절도사의 행적을 기림

50

11

조시영

진주성내

1899

선정비, 경남관찰사의 청렴과 선정을 기림.

51

12

김정식

남성동 251

1907

불망비, 전 의관 동민의 재난을 돌봄

66

13

서석삼

상대동 도동로

1937

불망비, 이웃 주민 은혜

98

14

서병태

상대동 645

일제시대

불망비, 학교증축, 흉년 주민구휼

100

15

서병선

상대동 645

일제시대

불망비, 학교를 세움.

102

16

서상룡

상대동 645

일제시대

불망비, 주민구휼

103

17

오필선

상대동

1897

불망비, 통정대부의 은혜를 기념.

108

연번

성명

소재지

제작연도

주요내용

비고

18

정치권

초전동 1552-1

1923

불망비, 참봉으로 주민을 구휼하고 학교 설립

116

19

문장현,

 

 

 

문재인(일명 장현)

초전동 1552-1

1932

불망비, 참봉으로 소작인에게 은혜, 소작인들이 세움

117

20

집현면 장흥리 서원동 795

1934

불망비, 숭능참봉, 이웃에게 은혜

543

21

집현면 장흥리 서원동

1915

불망비, 숭능참봉, 덕행 기념, 1933년 집현 봉강에서 이전

544

22

서달서

장재동

1921

기념비, 전 사과를 역임, 주민 구휼, 세금대납

125

23

서상필

장재동

1934

불망비, 유랑걸식인들에게 은혜를 베품, 걸식인들이 같이 세움.

127

24

장재동

1927

흥학불망비, 1야학회를 세움

130

25

서응순

장재동

1921

불망비, 전 사과를 역임하고 덕행을 베품. 소작인들 설립

128

26

여산송씨

장재동

1913

불망비, 서응순의 처, 덕행을 기념.

126

27

서봉룡

장재동

1919

불망비, 소작인과 빈민에게 은혜

129

28

박기용

이현동 북부주유소 옆

일제시대

불망비, 주민을 구휼하고 덕을 베품

141

29

이광보

판문동 상촌부락

1913

불망비, 이웃에 은덕

142

30

최윤삼

판문동 중촌부락

1917

불망비, 전 의관으로 은폐를 베품

143

31

전주이씨

주약동 석류공원

1917

불망비, 강재순의 처 가좌리 주민들이 세움.

강상호의 모 추정

150

32

강성행

내동면 삼계리

1918

불망비, 소작료감면

193

33

박규석

내동면 삼계리

1929

불망비, 유수리 주민에게 자혜

194

34

박재호

내동면 삼계리

1911

불망비, 축곡면(나동면의 일부) 주민에게 자혜

195

35

박주석

내동면 유수리 가호마을 독산초교

1939

송덕비, 가호사립학교 설립

211

36

강효순

정촌면 관봉리 봉전마을

1923

불망비, 전 참봉, 주민구휼

221

37

박필종

정촌면 소곡리

1916

자선비, 부사과 소곡리 소작인에게 은덕

227

 

연번

성명

소재지

제작연도

주요내용

비고

38

분성배씨

일반성면 창촌리 신기마을

1925

불망비, 전석길의 처, 진휼을 베품

296

39

허준

지수면 승산리

1906

불망비, 전 승지, 하룡봉리 주민들에게 은덕

403

40

지수면 승산리

1921

불망비, 전승지, 승산리 주민 구제

404

41

진석열

대곡면 유곡리

1940

기념비, 처사, 선행기념

429

42

황정선

금산면 장사리

1923

불망비, 숙부인,

481

43

김영섭

금산면 중천리 청천마을 회관 앞

1928

불망비, 주민 시혜

484

44

방석영

금산면 갈전리

1919

불망비, 주민들에게 혜택을 베품

509

45

조창래

명석면 외율리

1938

불망비, 사과, 은덕

572

46

임학규

명석면 신기마을

1917

불망비, 순릉참봉, 이웃 규훌

574

47

김상기

명석면 용산리 수시마을

1908

유공비, 정릉참봉, 공적비

583

48

박헌경

명석면 용산리 비조마을

1923

불망비, 참봉, 용산리 주민에게 은덕

588

49

명석면 용산리 비조마을

1923

불망비, 참봉, 이웃주민 은혜, 이현리에서 옮김

589

50

명석면 용산리 비조마을

1924

불망비, 참봉, 우수리 주민에게 은혜, 우수리에서 옮김

590

51

명석면 용산리 비조마을

1925

불망비, 참봉, 이웃주민 은혜, 용산 신기동에서 옮김

591

52

명석면 용산리 비조마을

1930

불망비, 참봉, 소작인과 과객에게 은혜

592

53

명석면 용산리 비조마을

1910

불망비, 참봉, 다리 공사 완공과 기여한 공적

593

54

명석면 용산리 비조마을

1918

불망비, 참봉, 덕곡리 소작인에게 은덕, 덕곡에서 옮김.

595

55

명석면 용산리 비조마을

1923

불망비, 참봉, 교량 만드는데 기여한 공적, 이현리에서 옮김.

596

56

김윤명

명석면 명석중학교

1941

불망비, 유학, 주민 혜택

600

57

정경민

명석면 명석중학교

1940

송덕비, 은혜베품, 소작인 설립

601

58

강진환

수곡면 원내리

1920

불망비, 유학, 덕행

634

 

조사대상 : 97, 친일부일 혐의자 26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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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덕경과 진주의 정신대할머니

 

아래의 글은 76() 저녁 7시 진주인권교육센터(센터장 권춘현)가  진주시 평거동 진주여성민우회에서 같은 주제로 주최하는 모임에서 이야기할 내용이다. 글은 진주참여연대 지방자치위원장인 심인경이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에서 제공받은 자료를 토대로 재구성했다.

 

 

공부하며 돈 벌러간 정신대, 그곳은 공장노예

위안부 화가로 알려진 강덕경은 19292월 경남 진주시 수정동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일찍 돌아가시고 어머니는 재혼하여 외가에서 자랐다.

집 가까이 봉래초등학교가 있었지만 진주초등학교(당시 요시노(吉野)보통학교)에 다녔으며 31회 졸업생이다. 초등학교 졸업 후 집에서 놀고 있는 딸이 보기 안스러웠던 강덕경의 어머니가 그 무렵에 새로 생긴 요시노보통학교 고등과에 딸을 입학시켰다. 고등과는 한 반 뿐이었고 학생은 60여 명 정도였다. 19441학년에 다닐 때, 일본 남자 선생님이 집에 와서 돈 벌러 일본에 가라고 권유했다.

  강덕경의 어머니는 안 된다고 우셨으나 강덕경은 배우며 돈을 벌 수 있다기에 가기로 했다. 같이 학교를 다니던 반장과 강덕경이 여자근로정신대 1기생으로 마산에서 모인 50, 진주 50, 다른 곳에서 모인 50명과 함께 부산 도청 앞에서 발대식(壯行會)를 가진 뒤 연락선을 타고 일본으로 떠났다. 배 양쪽에 군함이 두 대, 비행기 두 대가 따라왔고 배는 3층이었는데 강덕경 일행은 제일 아래층에 머물렀다.

여자근로정신대는 시모노세키를 거쳐서 도야마 현에 도착했다. 강덕경은 그곳의 비행기 공장에서 10개월 정도 일했다. 비행기 공장은 진주보다 넓은 것처럼 보였으나노동조건은 열악했다. 기숙사는 매우 컸고 한 방에 12~3명이 잤다. 그러나 이불은 요까지 포함해서 각 세 채씩만 주었다. 조선인들은 고향별로 나뉘어 방이 배정되었다. 근무시간은 12시간이었으며 밤일과 낮일을 일주일씩 교대로 했다. 임금은 받은 적이 없었다. 공장에서는 아침, 저녁만 주었고 점심은 콩떡 3개가 전부였다. 반찬은 된장국과 단무지가 뿐이라 싱거웠고 밥을 아껴 먹으려고 한 알씩 한 알씩 세며 먹기도 했다. 밤일을 마치고 오면 아침을 주고 저녁까지 아무것도 주지 않아서 너무 배가 고팠다. 저녁에 다른 방으로 가야할 음식을 몰래 가져다 먹었는데 그 방 사람들이 굶게 되는 줄도 모르고 배가 고파서 벌인 일이었다. 배가 고파서 진주에 편지를 보내자 소금과 콩을 보내와 먹기도 했고 비누를 부쳐 달라고 해서 공장에 출퇴근하는 일본인 여자들에게 주어 음식과 바꿔 먹기도 했다.

 

자유를 위하여...

공장에 온지 두 달만에 배가 너무 고파 진주에서 함께 온 친구와 도망을 쳤다. 공장 인근에 있는 조선인 집으로 새벽에 도망을 갔으나 어떻게 알고 왔는지 기숙사에서 나온 사람들에게 붙잡혀 갔다. 얼마후 진주에서 다시 50명이 왔고 그 중에 친척 강영숙이 끼여 있어 꾸짖었다.

 

너무 힘든 공장생활을 벗어나고자 친구와 다시 도망칠 계획을 세웠다. 과도한 노동으로 햇빛을 보지 못한 여공들의 비타민D 부족을 염려한 관리자들이 근로정신대 여성들을 단체로 공장 주변을 걷게 했는데 그녀들은 그 시간에 건물의 구조와 경계상태를 기억해서 탈출계획을 세웠다. 앞서 탈출한 방향과 반대방향으로 철조망을 뚫고 탈출을 했으나 곧 길을 잃고 군인에게 체포되었다. 체포된 후에 트럭에 실려 다음 날 새벽쯤 어딘지 모르는 부대로 이송되었고 그 부대에서 해방될 때까지 위안부 생활을 했다.

 

 

위안부, 살아남기 위해

부대에는 5명 정도 여성들이 있었고 천막집에서 생활했다. 천막집은 칸이 대여섯개로 나뉘어져 있었으나 잠은 군용 간이침대에서 여자들끼리 잤다. 하루에 10명 정도 군인이 왔고 토요일 오후부터 많이 왔다. 다른 부대에서 오면 밤에 나가야 했는데 너무 당해서 밑이 아파서 걸음을 못 걸으면 군인들이 끌다시피 천막으로 데리고 왔다. 음식은 군대에서 갖다 주었는데 주먹밥을 먹었다. 흙바닥에 상을 놓고 쪼그리고 앉아서 먹었다. 부대가 이동할 때 여자들도 군인들과 같이 트럭을 타고 어두울 때 이동했다.

 

두 번째 장소는 차를 타고 하루도 안걸렸다. 이동한 부대 근처에는 연못인지 강인지 알 수 없는 것이 있었고 나무도 많았으며 인가도 제법 있었다. 강덕경 일행이 도착한 부대에는 여성이 20명 정도 있었고 하루에 대여섯명 정도 받았으나 돈이나 ()표같은 것은 없었다. 같은 건물에서 만난 서른이 넘은 복순언니는 우리 돈은 저 놈의 새끼(군속)가 다 가지고 있다.”라고 말하며 너는 군인들에게 잡혀 와서 돈도 못받고 불쌍하다.”라고 강덕경에게 말했다. 강덕경은 그곳에서 도망가기 위해서 자신을 잡아온 고바야시에게 잘 보이려 노력했으나 소용이 없었다. 고바야시와 복순언니 외에는 말을 하지 않았고 항상 움츠리고 다녔다. 많은 남자들이 오는 토요일이 죽기보다 무서웠고 도망가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마츠시로 위안소

 

해방, 귀국

45년 해방 후 할머니는 신미나도(처음 도야마 공장에서 일할 때 도망쳤던 곳)로 돌아와서, 처음 도망쳤을 때 밥을 주었던 방씨 아저씨 집에서 일해주고 같이 귀국했다. 귀국하던 배에서 임신한 사실을 알아 현해탄에 빠져 죽으려 했으나 죽지 못하게 계속 아주머니가 따라다녔다. 가족과 같이 남원에 있다가 461월경에 애기를 낳았고 46년 봄에 진주 집에 돌아왔다. 그러나 강덕경의 어머니는 애까지 딸린 처녀를 집안에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 대신 부산으로 가서 살게 했다. 부산에 살면서 아이는 천주교에서 운영하는 고아원에 맡겼다. 식당에 일하며 일요일마다 아이를 만나러 갔다. 그러던 어느 날 자신의 아이가 입고 있던 옷을 다른 아이가 입었길래 알아보니 아이가 폐렴으로 죽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그 때 강덕경의 아이가 네 살이었는데 그녀는 아이의 주검을 직접 보지 못했기에 죽을 때까지 아이의 죽음을 믿지 않았다. 이후 식당일, 장사, 남의 집일, 하숙치기 등을 하며 평생 결혼하지 않고 살았다.

 

고통도 투쟁도 끝나지 않았다.

귀국 후, 열여덟에 월경이 시작되었으나 월경을 할 때마다 이틀씩은 방을 헤매고 다녔다. 마흔이 되기 전에 월경이 끊겨 잠시 몸이 좋아졌으나 방광에 이상이 생겨 입원을 자주 했다. 평생 동안 병으로 고통받았고 몸과 마음의 고통을 잊기 위해 술과 담배로 지세웠다. 지난 199722일 폐암으로 별세했다. 그녀는 일본으로 가서 증언하고 일본정부의 사과를 받기 위해 병상에서도 마지막까지 여권을 찾았다.

강덕경은 자신 같은 인생을 후세가 겪지 않게 하기 위해 자신의 경험을 공개적으로 밝혔다. 그녀의 삶은 결코 한국의 수치가 아니며 그녀의 삶에 대한 일본의 사죄와 배상을 모두 받아내는 것은 그녀의 인간다운 삶을 지켜주지 못한 우리 사회의 의무이다.

 

아사히신문은 일본인 저널리스트 도이 도시쿠 씨는 20154월 그림으로 일제의 만행을 고발해온 군 위안부 출신 고 강덕경 할머니의 일생을 다룬 책 '기억과 함께 사는 전 위안부 강덕경의 생애'를 발간했으며 도이 도시쿠 씨는1990년대 중반 2년간 강덕경을 포함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7명을 취재하며 찍은 다큐 영화 '기억과 함께 산다'67일부터 도쿄 히비야 컨벤션홀에서 상영했다.

 

아래는 강덕경 할머니를 제외한 진주와 연관이 있는 정신대 할머니들의 명단이다.

 

진주의 정신대 할머니들

이름

주소

본적 / 끌려간 장소

진주 지역과 관련 내용

하순녀

부산

진주 / 광주

출생은 진주에서 했으나 바로 목포, 영암으로 이사. 영암의 기억이 많음. 돌아와서도 영암 집으로 갔고, 광주에서 남의집살이.

손판임

서울

노원구

삼천포/ 하동

출생 하동, 진주로 이사, 돌아와서도 진주로.

최순월

함양

함안 / 진주 본성동

진주 본성동에서 살다가 과부가 되었고, 위안부로 끌려감. 돌아와서 진주로.

배영자

전남 여수

하동

경남 하동으로 시집가서 살던 중 남편 외도 심해서 진주로 가출. 진주에서 끌려감. 돌아와 하동으로. 남편이 죽고 여수로.

김경애

창원

마산 / 진주 옥봉동

진주시 옥봉동에서 부모님과 어렵게 살면서 진주봉래국교 졸업 후 품팔이를 하고 있는데 431차 정신대 징집이 시작되어 개성 고모집에 피신하여 징립을 모면했으나, 44년 진주 봉래동(옥봉동) 사무소 직원들이 강제로 끌고 감. 귀국 후 진주 부모님에게로.

이우율

부산

옥봉동

진주시 옥봉동 살 때 공장 직공 모집한다고 하여 응모. 귀국 후 진주 남동생 집

임정자

창원

산청 /충무 태평동

진주에서 장녀로 태어나 5살 때 부모님 따라 부산으로 이사. 충무 태평동으로 이사. 그곳에서 끌려감. 귀국 후 충무 집으로.

김연이

부산

부산 기장

/ 전남 고흥

귀국 후 진주로 갔는데 부모님 돌아가셔서 평남으로 감.

강도아

진주

산청 / 하동

귀국하여 살고 계시던 곳이 진주

김순이

진주

하동

진주로 귀국, 고향 하동으로. 89년부터 진주 거주.

 

 

76일 이야기할 내용

 

1. 강덕경과 진주의 정신대 할머니들에 대해 알기

2. 어떻게 할머니들을 기억할 것인가?

1) 할머니들에 대한 사료 정리와 발굴

2) 어떤 일들을 할 수 있을까?

3) 기념사업을 위한 시민모임 결성 여부

3. 그 외 함께 이야기할 내용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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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성

역사 2015. 6. 1. 14:40

진주성

 

진주는 5세기 경에 남쪽의 중요한 고을 중 하나였으며 백제 때 거열성에 속해 있었고 신라 신문왕 5(685) 청주가 설치된 이래 1925년 경남도청이 부산으로 이전될 때까지 경남지방의 수부도시였다. 경덕왕 때 강주(747)로 고쳤으며 고려 성종 때 목을 설치하여 진주(995)라 고치고 절도사를 설치했다.

 

고려 때 성곽은 토성이었는데 1379(고려 우왕 5)에 돌로 성을 쌓았다. 이때 성은 이름을 촉석성이라 했는데, 진주성은 처음부터 치소를 중심에 두고 그 외곽을 감싸는 일반적인 읍성과 달리 치소에서 떨어진 별도 위치에 강과 언덕으로 이루어진 지리 이점을 살려 지은 성곽인 점이 주목된다.

 

진주성은 16세기말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대체로 고려 말 석성으로 쌓은 모습에서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그 둘레는 대략 2,036m인데 현재의 진주성 내성 둘레인 1,700m보다 약간 큰 규모이다.

 

진주성은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한 해 전인 1591(선조 24)에 경상도관찰사 김수에 의해 성을 확장하였으며 현재의 장대동 놀이터 부근에 동문이 있었다. 그러나 이 때 동쪽으로 확장한 부분은, 물이 나고 습한 곳이어서 성벽이 취약하여 1593(계사년) 2차 진주성 전투에서 성벽이 무너지며 진주성 함락의 원인으로 작용했다.

 

경상우병사 이수일이 1603(선조 36) 무너진 진주성을 쌓기 시작하여 1605(선조 38)에 축성을 완료했다. 이때는 동쪽 성벽의 위치를 안쪽으로 약간 물리고 성 내부를 내성과 외성으로 나누어 기능을 분리했으며 이를 위해 성내에 새로 성벽을 축조하였다. 1605년에 수축된 진주성은 19세기말까지 큰 변화 없이 이어져 왔다. 17세기 이후 진주성에는 내성에 내북문(공북문), 내동문(촉석문)이 있었고 외성에 서문, 구북문, 신북문, 남문이 있었다.

 

진주성은 일제강점기 직전 외성이 먼저 철거되고 뒤이어 내성이 철거되었으며 진주성 내성에 들어서 있던 우병영은 1894년 갑오개혁에 따라 각도 병영의 혁파와 함께 폐지되었다. 이후 우병영은 경남도청으로 이용되었으며 그 외의 군사시설은 적절한 관리가 이루어지 않은 채로 남아 있다가 일제강점기에 들어와 철거되어 사라졌다. 이후에 내성 안에도 주민들의 살림집이 들어서고 주민 거주가 늘어나면서 진주성의 본래의 모습은 완전히 사라지게 되었다.

 

한국전쟁으로 폐허가 된 진주성은 1960년 족석루가 재건되었고 1963년 국가지정문화재 사적 118호로 지정되었으며 전체 면적은 173,036, 성곽길이는 1,760m이다. 1971년 정화사업을 통하여 본격적 복원작업이 시작되어 2002년 공북문 복원까지 이루어졌다.

 

참고자료

진주성·진주유등축제 세계유산 추진학술연구 진주성부분-, 2015, 진주시

진주성 이야기(진주문화를 찾아서17), 2014, 김준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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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진주성 관련 정보 현황

 

1. 석성건립연도

() 설명없음 : 두산백과

() 1377 : 한민족문화대백과사전

() 1379 : 진주시, 문화재청, daum 문화유산 사전, 위키백과

() 1437 : 브리태니커

 

2. 성둘레 : 내성(1.7km)과 외성(4km)

() 모두 설명 : 두산백과, 위키백과

() 내성만 설명 : 문화재청, daum 문화유산 사전, 진주시청

() 외성만 설명 : 브리태니커, 한민족대백과 사전

 

3. 성넓이

() 168,944: 한국민족문화대백과원

() 173,036: 두산백과, 문화재청

() 171,480: 진주시홈페이지

() 176,804: 진주시 관광안내 책자 및 홍보물

 

4. 정보오류

포털검색 결과

() naver : 지식백과 1088, 블로그 32,176

() daum : 백과사전 3(브리태니커, 위키백과, 문화대백과사전), 블로그 41(1건은 분류오류), 감상평 2

() naver 전수조사 못함. 구글 검색 필요함

 

디지털진주문화대전

() 진주성 관련 내용이 독립항목으로 검색 안됨.

() 검색된 진주성은 같은 이름의 노래에 대한 해설.

() 하위 항목 중에 나오는 진주성 정보 중, 성의 둘레, 넓이 정보 없음.

() 복원사업이 1984년에 마무리되어 현재의 모습 갖춘 것으로 나옴.

() 창열사와 창렬사의 검색내용이 다르며 창렬사로 검색해야 건물의 내력을 알 수 있음. 문화재청과 진주시는 창열사로 되어 있음.

() (5)진주성관련 주요논란 참조

 

daum 문화유산 사전, 지도

() 공사중 공북문 사진

() 문화재 설명에 용다리전설이 포함되어 있음.

() 블로거 리뷰 41(20105월부터~20147) : 1건은 분류 오류, 블로거 주용 내용은 아래와 같음

- 의암가는 길 위험, 진주성 정문 공북문,

- 문화재청 자료에 창렬사로 검색안되고 창열사로 검색됨.

- 창렬사 39위 모심

- 호국의 종 설명없음.

- 유홍준 : 성벽내부는 조선시대 읍성과 다르게 복원되어 있다. 석축은 조선후기에 쌓은 것으로 보인다. 성내 가변쪽 길을 찍고 경남도청 있었던 자리라고 설명함.

 

브리태니커

진주는 고려 말기부터 왜구의 노략질이 심해 방어시설의 보완이 시급했는데 그후 성벽 축조가 시작되어 1437(세종 19)에 성을 새로 쌓아 완성시켰다. 이때에 3개의 못물을 성 북쪽에 모이게 하고, 그 사이에 참호를 파서 적의 접근을 막는 일종의 해자(垓字) 구실을 하게 했다.

-- 임진년 대첩만 설명함.

 

위키백과

() 최경회의 후처이던, 논개도 적장 게야무라 로쿠스케를 껴안고 남강에 투신하여 그 의개를 떨쳤다

() 연혁에서는 “1975년에는 공북문 복원 공사를 마치고, 현재의 모습을 모두 갖추게 되었다.” 훼손과 복원에서는 “2002년 공북문을 복원

() 1896(건양 원년) 8월부터는 경상남도관찰사의 감영이 촉석루 앞에 건립되었다

() 최경회의 첩 논개는 그해 77(칠월 칠석) 촉석루에서 승리를 자축하는 연회를 열기 위해 기생을 소집한다는 방을 보고, 하늘이 주신 설욕의 기회라 생각하고 기녀 행세를 하고 축하연에 들었다.

() 77일 논개부인은 곱게 화장하고 화려한 옷을 입고 열 손가락에 가락지를 끼고 들어갔는데, 전설에 의하면 논개가 열 가락지를 낀 것은 왜장을 껴안되 풀어지지 않게 하려고 했다 한다. 연회에 참석하여 게야무라 로쿠스케 등 일본군 장수들이 술에 크게 취하자 춤을추며 연회장에서 빠져나와 남강이 내려다 보이는 높은 바위로 왜장을 유인해 혼신의 힘을 다해 왜장의 허리를 껴안고 남강으로 투신 자결하였다.

 

한민족문화대백과사전

() 다음해 6월에는 왜군 4만 여명이 진주성을 공격(10만명임)

() 1377년에 다시 돌로 쌓은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2년 뒤에 왜구의 침입으로 무너지자 우왕 6(1380)에 다시 쌓아 완공되었다.

() 진주성은 고려 말 이후 조선시대에 여러 차례 고쳐 쌓았던 축성 방법의 변천 과정을 살필 수 있는 중요한 유적이다. 또한 임진왜란의 산 역사를 담고 있는 성으로, 당시의 무기, 화약 등 국방사 연구에 필요한 자료를 갖춘 성으로 알려져 있다.(여러 차례 고쳐 쌓았으나 남아 있는 자료가 없어서 축성 방법을 알 수 없음)

 

진주성 안내문

() 김시민 : 적탄에 맞고 경상우도병마절도사에 임명된 후 진주성에 순절함(김시민은 순절 후 고향으로 시신 운구 중 경상우도병마절도사 임명장 받음, 김시민은 죽기 전에 자신이 임명된 사실을 몰랐음. 오해의 소지가 있음.)

 

 

5. 진주성 관련 주요 논란

 

() 논개

진주문화대전을 비롯한 여러 곳에 논개가 장수에서 태어났고 본관이 신안이며 씨이고 김천일의 첩(또는 정실부인)이라는 주장이 있다. 이는 모두 허구이다. 김수업 교수님이 작성하신 글 외에 대전의 다른 글들은 신뢰하기 힘든 것들이 많다. 따라서 그녀의 신상에 대해 거론하면 문제가 된다.

 

() 진주성

석성 건립연도, 증축문제 등이 주요논란거리이다.

진주문화대전에는 “1930년대 많이 허물어졌다라는 내용이 있으나 1910년 경남일보의 보도에 따르면 1910년대에 일본이 경술국치 후에 바로 외성을 허물어 대사지를 메웠다. 따라서 1930년대에 허물어진 것은 내성을 말한다.

 

() 삼장사

진주문화대전의 촉석루중삼장사기실비에서는 삼장사를 김성일, 조종도 이로라 적혀있고 삼절사와 다르다고 나와 있다. 진주문화대전의 고종후편에서는 김천일, 최경회, 고종후를 삼장사 칭하고 있다. 일각에서는 김천일(도절제사), 최경회(경상우병사), 황진(충청병사)’으로 보기도 한다.

 

() 충민사

진주의 충민사는 철거되어 없는데 고종후, 김시민 등이 배향되어 있는 것으로 나온다. 충민사는 김시민을 배향하기 위한 곳이다. 김시민, 고종후 등은 창렬사에 배향되어 있다. naver에는 충민사로 검색하면 김시민장군 충민사가 지도에 나오는데 충북 괴산에 있으며 19761221일 충청북도기념물 제12호로 지정되었다.

 

() 산홍

이지용이 자신의 첩이 되어 달라는 요청을 거부한 산홍을 때렸다라는 기사가 나오는데 그 뒤 죽음에 대한 이야기는 논란거리다. 자결했다는 이야기도 있고(진주문화대전 강동욱) 이지용에게 맞아 죽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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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향교

역사 2015. 5. 31. 21:14

진주향교(晉州鄕校)

 

향교는 유교의 옛 성현을 받들고, 지역 사회의 인재 양성과 미풍양속을 장려할 목적으로 설립된 지방의 교육기관이다. 향교의 역할은 교육과 제례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으며, 유생이 학문을 연마하는 명륜당과 일상 생활을 하는 기숙사 역할을 하던 동, 서재에서는 교육 기능을 담당하고, 공자와 저명한 유학자를 모시는 대성전 및 동·서무는 제례기능을 각각 담당하고 있다. 진주는 옥봉동 232-1(향교로 99-3)번지에 위치해 있으며 1972212일에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50호로 지정되었다.

 

진주향교(晋州鄕校)의 창건연대는 확실치 않으나 신라 소성왕 원년(799)에 지금의 진주(晋州)인 청주(菁州)의 노거현(老居縣)을 국학(國學)의 학생녹읍(學生祿邑)으로 했다고 한 것으로 보아 학교는 통일신라시대 때부터 운영된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 세종조 영의정 하연(河演)의 글로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수록된 사교당기문(四敎堂記文)에 의하면 고려 현종때 인물인 은열공 강민첨장군이 이곳에서 공부하였다고 한 것으로 보아 진주향교는 고려 초에 설립되었음을 알 수 있다.

 

각종 문헌자료를 종합하면, 고려 성종 6(987)에 향학당(鄕學堂)으로 창건되어 국학감(國學監)으로부터 경학(經學) 및 의학박사(醫學搏士)를 파견 수강토록 하였으며 현재의 의곡사 계곡에 위치하였다.

 

고려 현종 2(1011)에 중수 및 서재(書齋)를 중건하고 수학원(修學院), 학사(學舍), 서재(書齋), 사교학당(四敎學堂) 등으로 개칭되었으며, 조선 태조(朝鮮 太祖) 7(1398)에 문묘(文廟)를 창건하고 향교로서 면모를 갖추었으며, 훈도(訓導), 교관(敎官), 교수(敎授) 등이 성균관(成均館)으로부터 파견되었다.

 

조선 명종 13(1558)에 현 위치로 이건 하였으며 목사(牧使) 김홍이 대대적으로 중수하였다. 조선 선조 25(1592)에 임진왜란으로 인하여 소실(燒失)되었고 조선 선조 36(1603)에 병사(兵使) 이수일이 문묘(文廟)를 중건하여 1607(丁未年)에 병사(兵使) 김태허가 명륜당(明倫堂), (서재(西齋)를 중건하였다. 그 후 수차례 중수하였으며, 1962년에 강학공간(講學空間)인 명륜당(明倫堂), 동재(東齋), 서재(西齋)를 인접한 위치에서 현 위치로 이건하였고 제사공간(祭祀空間)의 출입문인 삼문(三門)은 현 위치의 대성전(大成殿) 앞마당으로 이건하고 풍화루(風化樓)를 삼문(三門)이 있었던 위치에 이건하였다. 명륜당(明倫堂)은 이건할 때에 정면 5칸에서 4칸으로 축소되었고 사교당(四敎堂)1986년에 중건되었다.

 

조선시대에는 국가에서 토지와 노비·책 등을 지급받아 학생들을 가르쳤으나, 갑오개혁(1894) 이후 교육기능은 없어지고 제사기능만 남아있다.

 

[건물구성]

 

대성전·명륜당·동무·서무·내삼문·동재·서재·사교당·풍화루 등 9동의 건물이 있다. 동서방향의 급경사지에 위치하고 있으며, 명륜당을 비롯한 교육공간이 앞에 있고 대성전을 중심으로 하는 제사공간이 뒤에 위치한 전학후묘(前學後廟)로 대성전을 중심으로 하여 건물들이 일직선 위에 대칭으로 배치되어 있다. 문묘는 대성전을 중심으로 양쪽에 동무·서무가 있고, 내삼문이 대성전 중심축에 배치되어 있다. 사교당은 명륜당이 중심에서 동쪽으로 치우쳐 있고 동재와 서재는 대성전을 중심으로 마주보고 있다.

 

대성전은 정면 3·옆면 2칸의 규모이며, 지붕 옆면이 여덟 팔()자 모양인 팔작지붕집으로 대성전으로는 보기 드문 지붕형태인데 팔작지붕 5량 구조로 전퇴(前退)를 두고 개방하였다. 동무·서무는 각각 정면 3, 측면 2칸의 맞배지붕 5량 구조로 되어 있으며, 정면 3칸이 쌍여닫이 띠살문이다. 내삼문은 정면 3, 측면 1칸의 맞배지붕 솟을삼문이다.

 

명륜당은 정면 4칸규모이며, 지붕 옆면이 사람 인()자 모양인 맞배지붕 5량 구조이며, 원래는 5칸이었던 것을 옮겨 지을 때 1칸을 줄인 것으로 보인다. 동재, 서재는 각각 정면 3, 측면 1.5칸의 맞배지붕 3량 구조이다. 풍화루는 정면 3, 측면 2칸의 팔작지붕 누각으로 누마루에 계자난간을 둘렀다. 사교당은 정면 4, 측면 1칸의 맞배지붕 3량 구조로 바닥은 마루를 깔았고 벽면 없이 전부 개방되었다.

 

중수 과정에서 많은 변형이 일어났는데, 특징적인 것은 교육 공간이 명륜당 이외에도 사교당을 배치함으로써 두 개의 명륜당이 중앙의 통로에 의해 좌우로 배치된 것 같은 느낌을 준다. 대성전의 영역이 너무 넓고 지대가 높아서 아래의 명륜당 영역이 왜소하게 보일 정도이며, 대성전의 내삼문 역시 너무 들어와 있어서 동·서무 사이를 가로 막고 있다.

 

연혁

987 고려성종6년에 창건 향학당으로 국학감에서 경학급의학박사를 파견수강

1011 고려현종2년에 중수급서재중건하고 수학 학사 서재를 사교학당으로 개칭

1398 조선태조에 문묘를 창건하고 향교로서 성균관으로부터 훈도교관 교수등 파견배치

1449 세종31년에 사교당 창건

1558 조선 명종13년에 비봉곡으로 이 건

1592 조선 선조25년에 임란으로 인하여 회진.

1603 선조36년에 구기인 현하대에 이건복원

1644 조선 인조22년에 현 위치 상대 중건(문묘).

1811 조선 순조11년에 중수 .

1907 조선순종1년에 중수

1910 경술국치부터 광복까지 항일독립운동기간중 일제탄압으로 전향의 명맥만 유지.

일제치하 6.25동란등으로 퇴락, 전적, 기물 일체일실.

1962년 명륜당, 풍화루 현위 치로 이건.

1971년 문묘급 원장 축대 대보수.

1972년 지방문화재 제50호로 지정.

1979년 동서재 중건.

1984년 명륜당 중수.

1985년 중수.

1986년 사교당 복원.

1992년 대성전 , 명륜당, 동서재를 보수급개수 개수.

1993년 명륜당 대보수. 영남향교사적, 대소인원개하마비문을 개수.

2004년 여성 유도회 결성. 충효교육원 유림회관 창건.

2005년 충효교육원 개원, 사단법인 범국민 예의실천 운동진주지부 결성, 대성전 서편 동량 대체등 대보수

2007년 청년유도회 결성.

2008년 시범향교지정.

 

자료이용자 참고사항

1.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관광공사의 설명은 고려 말 조선 초 경 현유(賢儒)의 위패를 봉안, 배향하고 지방민의 교육과 교화를 위하여 창건되었다.”라는 엉터리 설명으로 시작해서 토시하나 안틀림.

2. 향교의 역사, 역할 등에 대해서는 진주향교 홈페이지를 참조.

3. 진주시청의 자료가 가장 무난하며 자료에 인터넷 자료 중 오류도 있으니 확인바람.

4. 수행평가 학생들을 위해 떠도는 자료들을 재정리한 것임.

 

참고자료

진주역사(진주역사를 찾아서13), 김해영, 2010, 문화고을

진주향교, 디지털진주문화대전 http://jinju.grandculture.net

진주향교 홈페이지 http://www.jinjuhg.kr/

진주시청 http://tour.jinju.go.kr/01tour/SIGHT005.jsp?amode=_viw&cult_sno=468&cpage=1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100.daum.net/encyclopedia/view/14XXE0054928

한국관광공사 http://100.daum.net/encyclopedia/view/52XXX1955442

다음문화유산 http://heritage.daum.net/heritage/21595.daum#intro

위키백과

http://ko.wikipedia.org/wiki/%EC%A7%84%EC%A3%BC%ED%96%A5%EA%B5%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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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양호

역사 2015. 5. 30. 23:13

진양호

 

남강댐은 1920~30년대에 실시된 낙동강 개수계획의 일환으로 부산의 홍수피해를 줄이기 위해서 계획되었다. 하절기 집중호우로 발생하는 남강의 홍수량을 사천만으로 방류하기 위한 홍수조절 목적으로 1939년에 시공하였으나, 중단되었다가 1949년에 재착공하여 댐코어를 시공하는 도중 다시 중단되었다. 그 뒤 1962년에 제1차 경제개발5개년계획의 일환으로 홍수조절 외에 관개용수, 상수도용수 공급 및 발전을 포함하는 다목적 댐으로 건설되었다. 76개월의 공사기간을 거쳐 1969107일 준공되었다.

 

낙동강의 지류인 남강을 가로질러 완공한 낙동강 수계 최초의 다목적 댐으로 준공당시 길이 975m, 높이 21m의 중심코어형 필 댐(fill dam)이었다. 당시 진양호의 저수량은 13,600만 톤이었다. 1989년 댐 보강공사가 착공되어 19991220일 보강댐이 준공되어 진양호의 저수량은 39백만톤으로 늘어났으며 남강댐의 높이는 34m, 길이 1,126m, 현재 유역면적은 2,285이다. 기타 부대시설을 포함한 전체 보강 사업 준공도 200012월 완공되었다. 이로써 홍수조절과 생활 및 공업용수 공급은 물론 연간발전량은 4,000kw에서 4,130kw로 늘어났다.

 

남강댐 보강공사로 수몰된 지역은 진주, 사천, 산청에 걸쳐있으며 수몰된 가구는 1,641가구이며 수몰민은 6,698명이다. 진주시는 판문동, 귀곡동, 대평면, 명석면, 내동면, 수곡면 등 6개 동·면에 총 4814천 제곱미터가 수몰되었고 총 971가구, 3,530명이 이주 되었다.

 

주요 시설물로는 남강댐으로서 초당 1570의 계획 홍수량을 조절, 방류하기 위하여 문비 6문을 보유하는 여수로 시설과 홍수 때 사천만으로 방류를 위한 문비 10문을 보유하는 제수언 시설, 연장 11에 달하는 방수로 시설, 시설 용량 14kw의 발전소 시설이 있다. 남강댐 유역을 중심으로 52.623가 상수원보호구역으로 지정되어 있으며, 이 가운데 진양호상수원보호구역은 28.065에 이른다.

 

진주시 판문동과 내동면·대평면에 걸쳐 조성된 진양호는 경상남도 내 3개군 9개면에 걸쳐 있다. 주변에 약 2,000그루의 벚나무가 심어져 있어 봄 벚꽃 놀이가 펼쳐지고, 호수 주변 방풍림과 섬이 잘 어우러져 자연경관 또한 빼어나다.

 

수려한 자연 경관과 어우러진 진양호는 진주시민 및 서부 경남인들의 휴식공간으로 많은 사랑을 받고 있으며, 주변에는 우약정, 남인수 동상, 전통예술회관, 동물원, 진주랜드, 가족쉼터, 일년계단, 이재호 노래비 휴게전망대, 물 홍보관, 아시아 레이크사이드 호텔, 여관, 식당 등의 위락 시설을 갖추고 있다. 진양호 노을은 진주8경 중 하나이다.

 

자료 이용시 유의사항

1. 백과사전류는 1970년 완공, 관공서들은 1969년 완공으로 표시

2. 진양호 보강공사 이전 정보를 게재한 곳이 있으며 보강공사 이전, 이후 정보가 혼재된 곳도 있다.

3. 남강댐관리단의 정보를 기초로 했다.

4. 동네 학생들 수행평가용으로 돌아다니는 자료들을 재조합 정리했다.

 

참고자료

진주팔경(진주문화를 찾아서 8), 강희근, 2007, 지식산업사.

진주시청 홈페이지 진양호 http://tour.jinju.go.kr/01tour/SIGHT002.jsp

남강댐관리단 블로그 http://blog.naver.com/kwaternam

남강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100.daum.net/encyclopedia/view/14XXE0011756

진양호, 경남관광길잡이 http://www.gntour.com

진양호, 한국관광공사 http://100.daum.net/encyclopedia/view/52XXXX126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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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개제

역사 2015. 5. 20. 12:35

논개제

 

논개영정 - 논개사이버박물관

 

522일부터 24일까지 진주성 일원에서 논개제가 열린다. 논개제는 의암별제진주탈춤한마당을 주축으로 만들어진 봄축제이다. 진주탈춤한마당은 올 해 18회째 열리는 행사이며 의암별제는 1868년 진주목사 정현석이, 임진왜란 이후 진주기생들이 지내고 있던 논개제사를 정리하여 국가제향으로 만든 것이다. 공식 제례 중 유일하게 여성이 제관을 맡는 제사이며 종묘제례와 춘추제례 외에 음악이 사용되는 유일한 제례이다.

 

논개를 기리는 이 제사는 1651년에 이미 연례행사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오두인의 기록에 따르면 매년 629(음력), 진주성이 함락되던 날, 진주 사람들은 강가에 제단을 만들고 의로운 넋에 제사를 올렸다. 민중들이 자신들의 천하디 천한 딸을 기억하기 위해 지내던 이 제사는 천한 기생이 의기가 되고 의기사가 만들어져 국가에서 봄, 가을에 정식제사를 올리게 된 이후에도 계속 됐다. 일본에 의해 강제합병된 이후, 국가에서 주관하던 제사는 진주권번의 기생들이 다시 지내게 되었고 진주 기생들은 이 제사를 위해 전국의 예술가들을 진주로 불러들였다.

 

광복 후 논개 제사를 본, 시인 정지용은 호화 삼엄한 예술제”, “어린 기녀들이 논개제에서부터 배우고 체득하는 서럽고도 아름다운 전통이라 표현했다.

 

 

의암별제 - 논개사이버박물관

 

호화 삼엄한 예술제는 임진왜란 이후 진주 기생들이 시작했다. 진주 기생들은 논개를 기억하기 위해서 강가에 큰 제단을 쌓았고 아름다운 가무를 추었으며 거지들과 빈농들에게 음식을 나눠줬다.

 

1980년대에도 기생 제삿날이 되면 시내는 공기조차 무거워졌었고 아이들은 외출을 금지 당했다. 남강가 백사장에서 항상 놀던 철없는 아이는 누구인지 모르는 이상한 아줌마 때문에 모여드는 위험한 사람들이 많다고 부모에게 외출금지를 통보받았다.

 

30년이 지난 지금도 억울하기 짝이 없는 그 소년은, 기생이 뭔지 임진왜란이 뭔지도 몰랐으니 욕을 하고 싶어도 욕을 할 대상이 없어서 죄없는 방바닥만 두들겼다.

 

그 철딱서니 없는 소년에게 논개에 대한 제사가 적어도 400년은 넘었으며 어쩌면 500년도 넘게 계속되어온 행사이며 의로운 죽음을 함께 기억하기 위해 천하고 가난한 자들이 만든 이 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축제였음을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았다.

 

다가오는 주말 아이들과 함께 의로움을 기억하고 죽음을 노래하며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 이야기하며 즐기시길 바랍니다.

 

슬픔을 축제로 만든 곳,

 

진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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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연표

역사 2015. 5. 1. 21:26

진 주 연 표

연대

주요내용

알아둘 것

참고

백악기

공룡화석

내동면 유수리 가화천

천연기념물 390

백악기

공룡화석

진성면 가진리, ·공룡발자국

천연기념물 395

백악기

공룡화석

호탄동, ·공룡발자국

천연기념물 534

기원전

500년경

청동기유적

대평면, 초전 등

 

가야시대

옥봉고분군

수정봉, 옥봉의 이름 근원

 

685

(신문왕5)

청주

1925년 경남도청의 부산이전 이전까지 1400여년간 경남지역 수부도시

강주(747)

진주(995)

799

국학

노거현을 학생 식읍으로 지급

 

8세기

욱면랑 성불

6두품 귀진, 여종의 9년불공

 

987

향교

향학당으로 창건

현 의곡사 계곡

1241

촉석루

창건, 김지대

 

1379

진주성

석성으로 수축, 배극렴, 하륜

 

 

명석자웅석

백성의 부담을 덜고자 성돌이 되려한 돌

이설 : 몽고침략기

1498

금란계

경임, 이손, 김일손 등 29명 참가

제세치국평천하

1592~7

임진왜란

김시민, 논개

문록경장의역

1721

의기

논개 공인. 의암사적비, 최진한

 

1722

괘불탱

청곡사영산회

국보 302

1740

의기사

창건, 남덕하

 

1862

진주농민항쟁

유계춘, 삼정문란

 

1868

의암별제

정현석

현 논개제

1894

갑오농민전쟁

고승당산 전투, 내대

 

1895

경상우도소학교

근대 공립학교

현 진주초등학교

1909

경남일보

최초의 지방일간지, 장지연

 

1919

삼일운동

318, 김재환, 권채근, 강달영 등

 

1920

진주소년회

강영호, 고경인, 강민호

 

1923

형평운동

424, 강상호

 

1924

4257

축구팀

 

1925

도청이전

부산으로 이전.

 

1949

개천예술제

지방예술제의 효시

영남예술제

1970

남강댐

1939년 착공, 최초의 댐

 

1995

진주시

도농통합, 진양군 폐지

 

  시험삼아 만들어 봤습니다. 내용을 더 보충해야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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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년 대학원 1학년 때 논문쓰기위해서 정리한 글이다.

나는 브루스 커밍스를 E.H.카 만큼 위대한 역사학자라 생각했기에 그가 쓴 한국전쟁의 기원 이후를 연구하고자 했다.

이 주제를 포기했던 이유는 2가지이다.

첫번째는 나의 생각과 거의 유사한 글을 박명림 교수가 "대쌍관계동학"을 한국현대사에 접목시켜 그의 박사논문으로 썼고 출판까지 했으며 상까지 받았다. 이 글에 박명림의 논문이 없는 이유는 그는 역사학 전공자가 아니라 정치학 전공자이기 때문에 그 논문을 알지 못했다. 역사전공자들 논문을 정리하고 정치학과 사회학 논문, 책들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그의 책을 알게 됐다. 짜증스러워 그의 책도 안읽었고 이 주제도 덥었다.

이 주제를 덥었던 결정적인 이유는 박명림의 글의 아니라 내가 공부한 학교의 교수님들께서 현대사를 역사학의 한 부분으로 인정하는 것에 많은 의문점을 갖고 계셨기 때문이다. 교수님들은 역사학 밖의 학문(사회학이나 정치학, 경제학) 논문들을 인용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으셨다. 연구사 정리의 성격이 강한 이 논문에 박명림의 글이 인용되지 않은 이유이며 내가 박명림의 글을 늦게 알게된 이유이기도 한다. 어째든 학위 따려면 이 주제는 포기해야 했다.

하지만 십수년이 지난 지금도 마음에 남아 있다. 논문주제를 찾기 위해서 3달을 도서관에 살았다. 현대사와 관련된 도서관 책들을 처음부터 다시 다 읽었다. 주제를 정한 후에 지금보면 많이 부족하고 몇 자 안되는 이 글을 쓰기위해서 일주일 동안 밤을 새웠다. 과방에서 글을 썼는데 그 덕에 학부다니는 후배들은 과방에서 떠들지도 못했고 단 2대뿐인 과방 컴퓨터를 일주일 동안 쓰지도 못했다.

볼품없는 이 글을 내가 사랑하는 이유는 이 들에 담겨 있는 내용이 아니라 여기에 담겨있는 나의 열정이다. 그것을 함께 나누지 못해서 아쉽지만 나의 소중한 추억이다.

다시 보면서 글을 다듬었다. 내용 중 일부는 제대로 생각이 안나서 문장만 다듬었다.

다시 보니 글의 주제가 아니라 내 글쓰기 능력의 문제였던 것도 같다. 당체 뭔 말인지 알아먹기 힘들다....ㅋㅋ

 

 

한반도에서 1972년 체제

- 남한의 유신체제와 북한의 사회주의 신헌법체제를 중심으로.

 

1.연구목적

1972년에 남북한에 권위주의 체제가 확립되었다. 그러나 이에 대한 구체적인 연구논문을 찾아보기는 힘들다. 대다수 현대사 서술에서는 1945년 이후 남북한을 독립된 연구단위로 서술하고 한국전쟁 이후의 역사서술은 완전히 별개로 취급되고 있다(통일문제만이 예외이다.) 이것은 남북의 양체제가 너무나 극단적으로 다르며 남한연구자 및 외국연구자들의 북한에 대한 깊이 있는 정보접근 자체가 거의 불가능하다는 객관적인 조건에 따른 결과이다.

연구를 어렵게 하는 이러한 객관적인 조건은 1972년 남북한 헌법에 대한 내용분석에 앞서 그 헌법들을 통해 발현된 남북의 체제가 일시적인 유사성인지 해방 이후 한반도 역사의 지속적인 과정들 중의 하나인지에 대한 판단이 선행되어야 했다. 

1972년에 성립된 양체제에 대한 검토과정에서 일부 유사성을 찾기도 했으나(주1) 구체적인 진행과정은 매우 달랐다. 본 연구의 목적은 남북한사의 유사성이나 차이성을 밝히는 것이 아니다. 통일을 위해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남북역사를 하나의 역사로 인식하는 것이며 이 연구는 그 노력들 중의 하나이다.

그러나 연구는 남북한의 역사가 하나”여야 한다는 전제에 끼워 맞추기 보다는 "하나"로 인식하는 것이 실제로 가능한지에 대한 본질적인 문제와 가능하다면 어떻게 가능한지를 밝히는 작업이 될 것이다. 1972년은 양체제의 근대화 과정에서 중요한 전환점인데 근대화(주2) 과정에서 역사 경험을 공유하는 두 지역의 다른 체제가 유사한 과정을 거치는가 아니면 각각의 체제 특성이 더욱 강하게 나타나는가를 밝히는 것이 연구의 막지막 목표이다.

 

2.연구의 문제점.

 

남한현대사 서술에서 북한

현대사에서 북한을 다루는 문제에 대한 견해는 크게 두가지이다

강만길은 고쳐 쓴 한국현대사서문에서 이 문제를 “8.15 이후의 우리 민족사를 남한사를 주로 하고 북한사를 일부 덧붙이는 방법이나 남한사 따로 쓰고 북한사 따로 써서 하나의 책으로 묶는 방법은 옳지 않다. 북지역의 역사적 전개가 각각 고유한 역사성를 가진다는 인식을 바탕으로 하고 그 위에서 남북한의 8 .15 이후사를 둘이 아닌 하나의 역사로 용해시켜 대등한 위치와 같은 분량으로 다루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아직은 학문내외적으로 그렇게 쓸 수 있는 조건에는 이르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또 그런 역사인식에서 8.15이후의 우리 역사를 볼 때 하나로 된 남북의 역사를 한국현대사로 이름짓기가 어렵다는 문제도 있다”(주3)라고 하면서, 해방직후와 한국전쟁에서 북한을 약간 다루고 있을 뿐이다.

이와 다르게 김인걸은 한국현대사 강의에서 "통일과 우리 사회의 민주적 발전이 거저 주어지는 것이 아닐뿐더러 여기에는 다양한 사회세력의 이해관계가 얽혀있고, 그것도 국제적 여건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어서 그 전망이 밝은 것만은 아니라는 점도 이제 국민들은 잘 알게 되었다.해방이후 반세기 동안 엄청난 대가를 치르고야 얻게 된 이 소박한 상식은 그렇지만 아직 시민권을 확보하지 못하고 있는 듯하다. 이러한 현실은 국민들이 과거 분단체제하의 폭압정치가 빚어낸 공포나 관제이데올로기의 세례로부터 완전히 자유롭지 못하다는 데서 비롯된 것이기도 하지만, 우리 자신 그 상식을 뒷받침랄 만한 구체적 증거를 확보하여 진실을 드러낼 힘을 갖추지 못한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그 힘은) 모든 편견과 경직된 관념에서 벗어나 진실을 밝히는 작업으로부터 나온다. 그 과정에서 주어진 조건에 대한 객관적 인식을 높이고, 보다 밝은 세상, 보다 나은 인간적 삶을 위한 노력을 경주할 때 힘이 붙는다. 이때 문제를 정확히 파악하는 것이 일차적 과제이지만, 주어진 과제를 어떻게 풀어가야 할지에 대한 물음이 동반되어야"(주4)라고 밝히고 북한과 통일문제를 각각 독립된 장으로 다루고 있다

그러나 양자가 모두 냉전 이데올로기에 벗어난 객관적인 한국사 인식이 필요하며 그중 핵심적인 문제가 역사서술에서 북한 다루는 것임에는 일치하고 있다. 단지 지금 다룰 수 있는가 없는가(혹은 다루어야만 하는가 미뤄야 하느가)에 대한 입장의 차이가 있다.

두가지 입장이 갖는 공통점은 "한반도의 현대사는 불완전하다"는 것이다. 강만길은 북한사가 빠짐으로 인해서 결과적으로 전반적인 인식이 불가능하게 되었고 김인걸은 북한 자료와 비중의 상대적 소략과 자료의 나열, 평가의 부재로 인한 한계가 있다. 그러나 이런 견해들에 대한 판단은 그 자체가 역사적인 문제이므로 지금 현재로는 판단을 유보하고자 한다. 이 문제는 연구자들의 노력과 정치 상황의 변화에 의해 해결되어 갈 것이다.

 

방법론

1977년 안병영의 북한 연구의 방법론〉(주5)이라는 논문에서 비교공산주의 연구를 위해 미국학계에서 개발한 다양한 접근법을 제시하였다. 1988년 송두율의북한사회를 어떻게 볼 것인가〉(주6)라는 논문이 나온 이후 연구방법론에 있어서 내재적 방법론과 외재적방법론자들 사이에서 북한연구의 올바른 방법에 대한 논의가 진행되었다. 이 문제는 1980년대말의 주체사상논쟁으로 전화됐으며 1990년대 초반 사회주의권 붕괴 이후 북한 사회주의 정권의 존속여부로 인해 재차 논의 되었다.

방법론이 논쟁의 또다른 핵심이 된 이유는 북한문제를 다루는 사료와 논문들은 그 편차가 너무 크기 때문이다. 하나의 사회, 동일한 사건들에 대한 큰 편차의 평가들은 '연구자가 객관적인 입장을 어떻게 취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부터 하게되었고 '대상에 대한 객관적 인식을 위한 자신의 존재조건'까지 재검토하도록 요구했다. 

남한에 살고 있는 연구자인 "나"는 현재 북한의 내부에 있는가 외부에 있는가?

북한을 포함한 전체한국사에서 연구자인 "나"는 내부에 있으나 대립되는 양 체제 중에서 다른 한 체제 속해 있다는 점에서 "나"는 외부에 있다. 남북한에 대한 비교연구에 있어서 자신의 존재조건이 연구에 미칠 영향을 정확히 판단할 필요가 있으며 이것은 어떤 방법론을 채택하여 연구하는 것이 객관적인가하는 물음에 앞서 확인해야 할 문제였다.

방법론에 대해서는 아래에서 좀 더 상세히 다룰 것이다.

 

연구자와 자료(주7)

남북한에 대한 연구는 방법론 문제에서 밝혔듯이 연구자들 사이의 시각차이가 큰 것과 함께 글들이 학술적이라는 보다는 정치적이다. 특히 북한문제에서는 일방적인 찬양이나 매도라는 양극단의 형태가 많다. 최근에 역사 연구자들에 의한 저술이 과거에 비해서 많아졌으나 남북한의 6070년대에 대한 논문들 중의 많은 수가 비역사학자들에 의해 저술되었다. 연구자들 이외에도 기행문, 고발, 폭로, 찬양 등의 개인적인 감정을 담은 글들이 있다. 문제는 이런 글들을 어느 정도 참고해야 할 지에 대한 결론을 내리기가 어렵다역사관련 논문으로 현대사를 다룬 글들이 적고 개설적인 수준이다.

 

주제와 내용

연구의 목적을 밝히기 위해 검토해할 내용을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

1972년 체제(유신체제와 사회주의신헌법체제:이하 신헌법체제)의 등장배경(국내국외)과 성립

-당시 통일정책(7.4남북공동성명등)과 체제강화정책의 상관관계

-1972년 이전의 통일정책 및 체제강화 정책의 관계

-동일지역내 두 개의 지방정권 지배집단의 경쟁과 공존의 문제:(미소냉전체제에 대한 적대적 동지관계라는 해석이 한반도에서 유효한가의 문제)

-세계정치정세(중소대결, 중미국교정상화, 월남통일, 미소화해, 미국의 제3세계전략의 변화 등)의 변화와 한반도

근대화 과정에서 남북한의 차이점과유사점

-식민지 반봉건사회의 해체과정과 근대국가건설노선 및 그 운영

-자본주의적 발전조선과 비자본주의적(혹은 반제국주의적)발전노선의 비교

-스탈린식 공업화와 로스토우식 공업화의 남북한에서 전개과정

남북한 지배집단 정권수립과 통치권 행사에 대한 양 지역 민중들의 대응.

3세계 권위주의 체제와 비교: 독자적인가 일반적인 표현인가?

각체제수립의 모델검토(소련중국스페인프랑스등)(주8)

 

비평 : 이상이 지금까지 관련된 글들을 읽으면서 정리한 주제와 관련해서 검토해야할 내용이다. 내용이 방대하여 주제의 성격이 남북체제에 대한 전반적인 검토로 확대되었다. 역사 논문으로서 그 성격이 불명확하게 되었고 하나의 논문에서 깊이 있게 다룰 수 없게 되었다. 각 부분에 대한 대략적인 서술은 논문을 연표와 교과서를 베끼는 것으로 만들 우려가 있다. 깊이 있게 다룰 경우 해석상의 오류와 편향을 피하기 어렵고 내용의 방대함으로 논문이라기 보다는 책이 될 것이다. 범위를 주제와 내용의 성격에 대한 전반적인 재검토가 필요하다.

 

3. 연구방법론

연구자는 그 학문이 사용하는 방법론개념 및 이론들에 대한 비판적인 자의식을 필요로 한다. 왜냐하면 학문연구에 사용되는 방법론개념, 이론들은 외부세계를 단순히 중립적으로 투명하고 왜곡없이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 학문 주체의 주관적인 입장과 상태를 일정하게 반영하고 있고 바로 이러한 속성이 대상에 대한 관찰자의 이해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1980년대 이전까지 남한에서는 적대의식과 반공이데올로기에 의해 채색된 대부분의 북한 연구들은, 의식적이건 무의식적이건, 북한체제의 부정적인 측면을 확대강조하고 긍정적인 측면은 무시 왜곡함으로써 북한체제에 대한 객관적인 이해를 방해했다. 기존의 방법론에 반발하여 1980년대 후반부터 내재적 접근법이 대두하였다. 송두율강정구이종석 등의 내재적 접근론자들은 기존의 접근법들인 전체주의 이론산업사회론에 근거한 수렴이론 등이 사회주의를 으로부터, 곧 자본주의나 자유민주주의에 입각한 가치나 척도에 따라 분석하기 때문에 근본적인 결함이 있다고 강력하게 비판하면서 사회주의 사회를 으로부터그 사회의 이념과 논리에 따라 분석하자는 내재적접근법을 주장하였다.

이러한 내재적 접근법에 대하여 강정인은 내재적 접근론자들이 외재적 접근법 및 내재적 접근법에 대한 편협한 이해, 북한체제의 긍정적인 측면을 부각시키는 논리의 일방성, 북한 체제에 대한 비판적 태도의 회피 또는 결여(주9), 사회주의권 붕괴와 변혁방향을 설명하는데 따른 내재적 접근법의 무력성등의 비판을 하면서 대상의 정확한 인식을 위해서 외재적 방법론은 필요하며 사회현상을 두 입장에서 동시에 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주10)

송두율은 내재적 접근법 비판에 대한 반론에서 외재적 방법론이 은연중에 외재적=보편적=서구적이라는 등식에 빠져 있음을 비판하며 북한 사회에 대한 내재적접근은 남한사회에 대한 동등한 수준에서의 내재적 접근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그는 내재적(immanent)’이라는 뜻은 우리 인식이 경험에 의거하고 있다는 점을 우선 강조하는 것이며 내재적의 반대말은 외재적(extemal)이 아니라 선험적(transzendental)'이며 북한 사회의 내재적접근은 북한 사회주의가 스스로 제시한 이념경험의 긴장관계를 드러내 보일 수 밖에 없으며 남북한 사회에 대한 수미일관된 내재적접근은 경우에 따라서 외재적척도의 자의성을 배제함은 물론 사회과학적 논리와 방법의 일관성을 보여 준다고 주장한다.(주11)

김연철은 이러한 일련의 논쟁이 연구방법의 논쟁이기보다는 인식의 방법에 대한 논쟁임을 지적하였다. 그는 모든 관찰자는 외부에 있으며 문제는 관찰방법이며, 여기서 행위자의 이념가치동기목표를 이해하고 해석한다는 것과 방법을 갖고 관찰한다는 것 사이에는 대립적인 측면보다 보완적인 측면이 많음을 지적했다. 또한 북한 연구의 문제점으로 다른 현실사회주의권 국가와는 달리 제한된 범위 내에서도 연구자들의 직접적인 연구가 불가능하다는 것과 북한 연구자들의 북한에 대한 경험이 북한 공식 출판물 뿐 임을 지적한다.(주12) 그는 북한연구에 있어서 이러한 경험 제약을 극복할 대안으로서 경험비판을 제안한다.(주13)

이런 일련의 논쟁은 우리의 남북한 연구가 여전히 초보적인 단계이며 연구자들 스스로가 정치상황의 한계에 매어 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역사의 실체로서 북한에 대해서 객관적인 인식을 갖기위한 학문적인 노력은 더욱 깊어지고 있다.

 

4.남북한 헌법에 대한 분석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대한민국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사회주의헌법(1972.12.27) 11149

헌법개정안 공고에 대한 대통령 담화 및 동제안 이유서(1972.10.27)

막스-레닌주의를 우리나라의 현실에 창조적으로 적용한 주체사상을 자기 활동의 지도적 지침(4)

민주주의의 한국적 토착화를 기한다

․…대안의 사업체계와 새로운 농업지도체계에 의하여 나라의 경제를 지도 관리한다(30) 경제건설을 다그치고 인민생활을 끊임없이 높이며 국방력을 강화할 수 있도록 인민경제 발전계획을 작성 실행한다(31)

정치, 경제, 사회, 문화등 모든 면에서 안정을 유지하고 번영의 기저를 확고히 하였으며

새마을 운동을 국가시책의 우선 과업으로 정하여

․…최고인민회의와 지방 각급 인민위원회를 통해 주권을 행사(7)

․…집단주의 원칙을 기초(49)

국민의 기본권을 우리 나라 실정에 알맞게 최대한 보장하였고

국가는 내외 적대분자들의 파괴 책동으로부터 사회주의 제도를 혁명화노동계급화한다.(11)

조국의 평화적 통일이라는 역사적 사명완수를 지향

전화의 재발을 미연에 방지하고 평화로 조국통일의 길을 모색

주석은 국가의 수반이며국가주권를 대표한다(89)종앙인민위원회를 직접 지도(91)정무원회의를 소집하고 지도(92). 주석은 최고인민회의에서 선거(90)한다.

대통령은 통일주체 국민회의의 대법원에 의한 간접선거 법관과 국회의원13에 대한 임명권 장악 국정 감사권 폐지. 중요정책을 국민투표로 합법화

*북한의 사회주의 헌법 조문과 남한의 헌법개정안 공고에 대한 대통령 담화 및 동제안 이유서는 비교의 격이 맞지 않으나 헌법 원문을 구하지 못해서 모두 한 책한국현대사강의에서 재인용했음.

*‘대통령 특별선언 및 동 공약 계엄포고 제1(1972. 10. 27)에서 인용한 것임

 

북한 신헌법의 특징은 노동당의 지위를 명시하였고 사회주의적 소유제도를 확립하였고 주체사상이 헌법규범화 되었으며 국가 주석제도를 도입하여 그 권한을 강화하였다.(주14) 유신헌법의 특징은 대통령이 중요정책을 주민투표로 합법화 시켰고 통일주체국민회의가 대통령를 선거하며 국회의원13 를 대통령이 추천하며 법관임명권을 대통령이 갖으며 대법원의 위헌 판결권을 헌법위원회에 귀속시켰다. 구속적부심제를 폐지하고 자백만으로 처벌이 가능하게 되었고 긴급조치권을 대통령이 갖게 되었다.(주15)

양 헌법은 표현방식의 차이가 있으나 대통령(주석)의 권한을 절대화시켰다는 공통점이 있다. 최고권력자의 선출을 간선제로 하였다.(주16) 중요정책의 국민투표제와 지방인민위원회를 통한 주권의 행사 등의 표현으로 형식적 민주주의가 확대된 것처럼 보이게 하였다. 자신들 체제의 존재목적으로 통일을 말하고 있다.(:조국의 평화적 통일, :온 사회를 혁명화노동계급화 한다사법부에 대한 부분은 살펴보면 북한은 1956년 종파투쟁(주17) 이후 사법부에 대한 행정부의 우위가 확보되었으며(주18) 유신체제에서는 이때 그 우위를 법적으로 확인하려 하였다 .북한의 신헌법체제는 50년대 이후 권력투쟁의 결과물로서 김일성의 권력독점을 확인하는 것으로 유신체제는 박정희의 권력 독점을 위해 만들어 졌다는 차이가 있다.

참고문헌

강만길, 고쳐 쓴 한국현대사, 창작과 비평사, 1994

김인걸 외, 한국현대사강의,돌베개, 1998

임영태, 대한민국 50년사, 들녁, 1994

한국현대사연구회 현대사 연구반, 한국현대사2,3,4, 풀빛, 1991

중앙일보특별취재본부, 실록 박정희중앙 M&B, 1998

역사문제연구소, 역사비평,역사비평사

최승화 외, 북한개론, 을유문화사, 1990

이종석, 조선로동당연구, 역사비평사, 1995.

안병영, 현대공산주의연구, 한길사, 1982.

(주) --------------------------------------------------------------------------------------------------

1. 중공업 중심의 경제개발, 군부 중심의 권력운용, 대외 자주화 노력, 북한에서의 남로당세력 제거와 박정희의 이북출신 군인맥의 척결 등

2. 박정희는 자신의 집권에 대한 정당성으로 사회적합의였다. 4.19의 민주화 개념을 대신해서 근대화를 제시했다. 여기서는 산업사회, 탈봉건사회를 향한 일련의 과정들에 대한 총칭으로 사용한다.

3. 강만길,고쳐 쓴 한국현대사, 창작과 비평, 1994.

4. 김인걸 외 편저, 한국현대사강의, 돌베개, 1998.

5. 안병영, 현대공산주의연구, 한길사, 1982.

6. 송두율, 북한사회를 어떻게 볼 것인가, 사회와 사상, 198812월호.

7. 사료와 논문의 문제는 가장 중요하지만 생략했다. 지금까지 확인된 논문목록과 사료의 목록만으로 그 양이 대단히 많은데 아직까지는 제대로 구하지 못했다. 지금까지 본 글들은 학교와 시중에서 구할 수있는것들에 대한 검토하였고 현재까지 출판된 중요자료들에 대한 검토후에 자료의 문제는 말 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여기에서는 이문제를 생략했다.

8. 신헌법의 정치활동 규범들의 하나인 군중노선은 북한 당국의 공식적인 주장과는 다르게 중국의 마오저뚱이 먼저 주장하고 문화혁명 시대에 실천한 것이며 유신체제의 구상자들의 대통령의 비상대권의 필요를 프랑스 제5공화국 헌법 제 16조의 모델을 빌어서 강조했다.

김민배, 유신헌법과 긴급조치〉《역사비평30, 역사비평사, 1995년 가을호

9. 이종석은 이에 대하여 진보적인 북한연구자들이 북한에 대한 비판적인 언명이 정치권력에 의해 북한 혐오증을 확대재생산하는데 이용될 소지가 크다는 이유가 북한비판을 회피하는 이유라고 밝혔다.

이종석, 북한연구방법론, 비판과 대안, 역사비평1990년 가을호, 역사비평사.

10. 냉전구조의 포로적인 시각에서 보면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차이가 대단한 것 같지만, 장구한 역사의 관점에서 보면 산업사회와 봉건사회(농업사회)의 차별성이 더욱 부각되는 것이 당연하다. 그러므로 연구자의 연구동기와 연구주제에 따라서 자본주의와 사회의 차별성에 크게 관심을 가질 수도 있겠지만, 이와 반대로 산업사회 또는 근대사회로서 양자의 공통성에 관심을 가지면 연구하는 접근법 역시 적절한 접근법이다. 앨빈 토플러의 3의 물결, 다니엘 벨의 탈산업사회이론, 정보사회론은 이러한 이론적 전제에 입각해 있다.

강정인, 북한연구 방법에 대한 새로운 제언〉《역사비평26, 역사비평사, 1994년 가을호

11. 송두율, 북한연구에서의 내재적방법재론〉《역사비평28, 역사비평, 1995년

12. 공식적인 서술은 현실을 반영할 뿐이지 현실 그 자체는 아니다. 연구자의 인식대상은 북한의 현실이지 공식 문헌의 서술은 아니다. 역사적 사건에 대한 사후적 성격 규정의 일방성을 비판적으로 분석하지 않는다면, 이는 행위자 진술에 주석을 다는 행위이다. 연자들의 일부가 주석을 다는 행위’(어떤이는 요약, 어떤이는 치장)를 연구라고 착각하고 있는 현실

김연철, 북한연구의 이데올로기적 편향 극복〉《역사비평29,역사비평사, 1995년 여름

13. 그는 공간문헌의 은유성, 간행시기별 서술의 차이, 정기간행물 등에서의 누락탈락삭제의 의미분석 등을 경험인식의 불안정성의 극복 대안으로 제시하고 있다.

김연철, 위의 글

14. 최승화, 헌법과 통치구조〉《북한개론, 을유문화사, 1990.

15. 류정임, 유신체제의 성립과 전개〉《한국현대사3, 풀빛, 1991.

16. 통일주체국민회의와 최고인민회의의 위상은 다르다. 전자는 대통령 선거인단의 성격이 강하고 후자는 원래가 대의기관이다. 그러나 최고인민회의에 출마할 사람의 선택권을 노동다이 독점하고 있다는 점에서 최고 권력자의 영구집권 의지를 반영하는 기구라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다.

17. ‘8월 종파라고 불리는 사건이다. 이종석은 이 투쟁이 권력투쟁의 영역에만 머물지 않고 사상투쟁과 경제건설사업에 연계되면서 추진된 점을 주목하고 김일성 중심의 단일지도체계를 확립하는 계기로 작용하였으며, 이것이 당내 정치과정의 역동성 탈각과 경직화를 낳은 결정적인 계기로 보고 있다.

이종석, 조선로동당연구, 역사비평사, 1995.

18. 이종석은 1950년대를 북한에서 사회주의주체사상유일지도체계 등 오늘의 북사 사회를 대표하는 중요한 특징들이 형성된 시로 보았다.

이종석, 북한의 전후복구건설과 반종파투쟁〉《한국현대사2, 풀빛, 1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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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기생 논개

역사 2014. 9. 3. 13:32

진주기생 논개

 

  ------------ 참고 사진, 사료들은 다음에 시간나면 올리겠음. 언제 시간날지 모림. --------------------

논개만큼 유명하면서 논개만큼 그 삶을 알 수 없는 역사인물을 찾기도 쉽지 않다. 논개는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으나 그 대부분이 소설에 가깝다. 그녀가 언제 태어나서 몇 살에 죽었으며 그 부모가 누구이며 고향은 어디인지, 어떻게 살았는지 전혀 알 수 없다. 그녀에 대한 증언은 유몽인의 어우야담에 전언으로 나오는데 그녀의 죽음만을 알 수 있을 뿐이다. 남겨진 자료가 없기 때문에 그녀에 대한 연구는 매우 미흡하다. 그녀에 대한 연구논문보다 그녀에 대한 소설(또는 상상력의 결과물에 대한 연구)이 더 많은 역사인물이 논개이다.

논개에 대한 이야기들 중 대부분이 허구인 상황에 대해서 박노자는 그의 논문 임진왜란과 의기(義妓)전승전쟁, 도덕, 여성에서 논개의 신격화라 표현했다. 박노자가 신격화라 표현할 만큼 그녀의 삶은 알려진 것이 없으나 그 죽음은 충격적이라 많은 사람들의 상상력을 자극해 왔다. 이 글도 논개의 삶을 명쾌하게 밝힐 수는 없으며 그녀가 죽음을 통해서 표현하려 했던 바를 찾아보려 한다.

 

논개의 죽음이 진주 외부에 최초로 알려진 것은 유몽인에 의해서다. 유몽인은 임진왜란 당시 세자였던 광해군에 의해 삼도순안어사’(1593. 충청, 전라, 경상도를 돌아다니며 살피는 어사)로 임명되어 진주에 왔고 이 때 논개의 이야기를 들었다. 유몽인은 논개의 이야기를 동국신속삼강행실도”(1617. 충신, 효자, 열녀에 대해 기록한 책)에 넣고자 했으나 관기를 충신이나 열녀 부문에 넣을 수 없다는 반대의견 때문에 국가의 공식 기록에 논개를 넣을 수 없었다. 논개는 음탕한 창기이기 때문에 국가로부터 외면 받았고 이에 대해 유몽인은 거룩하지 않으면 충성이 아니냐라고 물으며 그녀의 이야기를 어우야담’(1621)에 남긴다.

신분이 천한 것들은 숭고할 수 없기에 그 죽음도 국가로부터 인정받지 못하고 야담이 되었고 후대의 사람들은 그것이 실제로 있었던 일이냐며 반문하거나 신격화하는 이야기들을 만들어냈다.

 

유몽인 이후 논개에 대한 기록은 1629년 정대륭이 논개가 순국한 바위를 의암이라고 쓴 것과 1651년 오두인이 의암기를 쓴 것이 전부다. 논개의 죽음이 다시 논쟁거리가 된 것은 그녀가 죽고 128년이 지난 1721년이다.

 

1721년 경상우병사로 진주에 부임한 최진한은 진주 사람들의 하소연을 듣고 비변사로 논개를 포상해 달라는 보고를 한다. 이에 비변사는 왕에게 보고하고 이듬해(1722)근거할 만한 기록을 보내라고 한다. 그러나 130년전에 죽은 천한 기생의 기록은 찾을 수 없었기 때문에 진주사람들은 유몽인의 증언과 유사한 논개에 대한 이야기를 돌에 새겨 올려 보냈다.(의암사적비)

이에 정부는 논개의 죽음이 거룩하다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이를 보답할 것을 알리며 자손을 찾아서, 별도로 부역을 면제시켜 주고 이제까지 하지 못했던 나라의 특별한 은전을 보이도록 하라는 지시를 내린다. 경상우병영은 정부의 지시를 이행하기 위해서 관할하는 관청에 논개의 자손을 찾아보라는 공문을 보내지만 찾을 수 없다라는 답변만 받았고 이 보고에 대해서 정부는 아무런 답이 없었다. 이때 논개는 공문에 처음으로 음탕한 창기’, ‘관기가 아닌 의기로 기록되었으나 그녀는 다시 잊혀졌다. 임금이 바뀌자 최진한은 다시 상소를 올렸지만 이에 대한 영조의 답변은 쌀쌀했다. “처음에 구별을 둔 것에 반드시 까닭이 있었을 터이다. 야담에 적혔으나 어찌 믿을 수 있겠는가? 또 백여 년이나 지난 일이라 가볍게 처리할 수 없다.”

 

가볍게바뀔 수 없었던 논개에 대한 영조의 입장이 바뀐 것은 이십년이 다 되어가는 1740년이다. 경상우병사 남덕하가 영조에게 장계를 올려 의기에게 사당을 세워 포상하기를 청하여 마침내 허락을 받았다. 논개는 죽은 지 147년만에 국가로부터 그 공적을 인정을 받았다. 이를 주도했던 경상우병사 남덕하가 이인좌의 반란을 진압한 일등공신이었기에 가능했다는 주장은 너무도 서글픈 또 다른 역사의 모습이다.

 

한 세기를 훌쩍 뛰어넘는 그 오랜 시간동안 논개는 잊혀지지 않았을까? 제대로 된 역사기록도 없고 정부도 인정하지 않았고 자식도 일가친척도 없는 그녀는 어떻게 사람들의 기억 속에 남아 있었을까?

 

논개를 기리는 제사는 1651년에 이미 연례행사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오두인의 기록에 따르면 매년 629, 진주성이 함락된 날, 진주사람들은 강가에 제단을 만들고 의로운 넋에 제사를 올렸다. 이 제사는 영조대에 의기사가 만들어지고 봄, 가을에 제사를 올리게 된 이후에도 계속 지냈다. 광복 후 논개 제사를 본, 시인 정지용은 호화 삼엄한 예술제”, “어린 기녀들이 논개제에서부터 배우고 체득하는 서럽고도 아름다운 전통이라 표현했다.

 

왜 진주사람들은 침략군 한 명(논개소이영지論介笑而迎之 왜장유이인지倭將誘而引之)을 껴안고 강물에 투신한 음탕한 창녀를 수 백년 동안 기억하기 위해서 노력했을까? 임진왜란 때, 진주에서 죽은 숭고하고 거룩한 자들이 수십 수백이며 그들보다 덜 숭고하지만 음탕한 창기보다는 비천하지 않은 수만명의 양민들이 죽었다. 촉석루 앞 남강은 투신 사람들의 시체로 강물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그 많은 사람들 중에 왜 하필 음탕한 기생 논개를 수 백년 동안 기억하려 노력했을까?

 

어떤 사람은 진주사람들의 기억과 유몽인의 기록에 착오가 있었을 수도 있다고 주장한다. 어떤 이들은 꾸며진 것이라 주장한다.

 

논개에 대한 대부분의 이야기는 꾸며진 것이 맞다. 1722년 공문을 통해서 국가기관을 동원하여 찾아보려 노력을 했으나 등장하지 않았던 그녀의 자손은 1740년 의기로 공식 인정받은 10년 후인 1750년에 처음 등장하게 된다. 이 때 논개는 진주성에 죽은 최경회의 첩이 된다. 논개는 음탕한 창기에서 첩실이지만 사대부의 부인으로 신분이 상승한다. 반세기 후에는 고향도 갖게 된다. 1799년 발간된 호남절의록에 장수 사람으로 등장한다. 이후 다시 반세기 정도 지난 1846년 장수현감 정주석은 촉석의기논개생장향수명비를 세워 논개의 고향을 장수로 공식화한다. 1872년에는 장수현읍지를 통해서 장수현 임현내면 풍천마을이 논개의 고향으로 밝혀진다. 그리고 다시 백년이 흘러 1977년 함양군은 의랑 논개를 펴내며 함양군 서상면 금당리 방지마을에 논개의 무덤이 있다고 밝힌다.

 

국가로부터 의기로 인정받은 이후에 등장한 경천동지할 역사발굴의 결과들 덕분에 논개는 천한 기생에서 거룩한 신화가 되었다.

 

그러나 우리가 논개의 죽음을 이해하기 위해 봐야 할 것은 그녀에 대한 신화가 만들어지 지기 시작한 이후가 아니라 그 앞이다. “의기 논개가 되기 이전 한 세기가 넘게 진주의 관기들에 의해서 이루어진 그녀의 제사에 대해 생각해 보자.

 

전태일은 노동자의 인간다운 삶을 보장하라며 죽었지만 전국의 공장 중 그의 기일에 제사는커녕 묵념을 올리는 사업장을 찾아보기 어렵다. 관기(관청에 소속된 기생)는 현재의 노동자들보다 수백배는 더 어려운 처지에 있었고 가장 신분예속이 심했다. “백정은 기생들도 안받는다라는 말 속에 이 두 신분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어떠했는지 알 수 있다. 변사또가 제일 먼저 한 일이 관기들 확인이었다.(점고)

 

그러나 논개의 제사는 관기들이 주최했다. 기생들이 기생의 제사를 위해서 강가에 큰 제단을 쌓고 아름다운 가무를 추고 거지들과 빈농들에게 음식을 나눠줬다. 그녀의 죽음이 실제보다 과장된 것이라면 그런 일이 가능했을까? 필자가 초등학교 다니던 1980년대 초반만 해도 629기생 제삿날이 되면 시내의 공기조차 무거워졌고 외출을 금지 당했다. 남강가에서 항상 놀았던 그 초딩은 누구 인지 모르지만 밖에 놀러 나가지도 못하게 한다고 죽은 사람 욕을 해대며 방바닥에 화풀이를 했다.

 

2007년 박노자의 논문이 논개 이야기가 만들어진 것으로 진주에 알려지고 이에 대응하기 위해 진주의 유력인사들이 모였다. 그 자리에서 나이 지긋하신 진주 사족의 후예는 우리 어르신들이 할 일이 없서 기생년 이야기나 만들고 다녔을까?”라는 입장을 밝혔다.(당시 필자가 서울에 가서 박노자를 만나 사실 확인을 해야 하는 임무를 맡았기에 그 자리에서 동네 어르신들의 여러 가지 이야기를 경청해야 했다.)

 

150년만에 국가로부터 죽음을 인정받은 논개의 이야기는 계속 확장되었고 논개가 죽은지 400년이 지났으나 그녀의 이야기는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그녀가 죽은지 400년만에 그녀의 무덤까지 발견되었으니 앞으로 50, 100년 후에 논개에 대한 새로운 무엇이 발견되더라도 그리 놀라운 것은 아니리라.

 

지금까지 만들어졌고 앞으로도 꾸준히 만들어질 논개에 대한 수많은 전설과 상상들은 그저 이야기꺼리일 뿐이다. 우리가 소설이 아닌 역사로서 논개에 대해 기억해야 할 것은 임진왜란을 겪었던 진주사람들이 논개의 죽음을 통해서 전달하고자 했던 것이 무엇일까 하는 것이다.

 

진주를 끝까지 지킬 것이라는 임금을 말을 믿고 7만명의 사람들이 진주성에 들어왔고 학살당했다. 권율이 지휘한 국왕의 군대는 일본군의 병력에 놀라 전라도로 철수했고 명나라의 군대는 일본군과 협상하며 진주를 포기했다. 10만의 침략자들에게 포위된 진주성은 10일을 싸웠으나 하늘조차 진주사람들을 버렸다. 큰 비로 활줄은 늘어지고 성벽은 큰 물살에 흘러내렸다.(1591년에 실시한 부실한 진주성 확장공사 때문에 성벽이 무너졌으나 당시 진주 사람들에게는 하늘이 버린 것으로 이해됐을지도 모른다.) 홍의장군 곽재우는 진주성을 비울 것을 주장하며 입성하지 않았고 방어를 책임진 장수들은 서로 헐뜯기 바빴다. 방어하는 장수들의 문제점을 지적한 늙은 기생은 목이 잘렸다.

 

참혹한 학살의 현장, 버림받은 자들의 대지에 7만명 중 가장 힘없고 천한 자에 속한 여성이 스스로의 삶을 결정하기 위해서 일어섰다. 일본의 지배자 토요토미 히데요시로부터 진주성에 살아있는 모든 것을 죽이라는 명령을 받은 학살자의 군대도 그녀가 위암(危巖, 논개 사후 의암義巖)걸어가는 길을 막지 못했다. 국왕의 대리자들로부터 받은 것은 술잔과 멸시와 정액뿐인 그녀가, 유몽인의 주장처럼 국왕에서 충성을 다하기 위한 목적으로 학살자와 함께 죽기 위해서 그 위험천만한 길을 걸어갔을까?

 

참혹한 전쟁을 겪은 사람들이 전쟁의 교훈을 잊지 않기 위해서 선택한 사람이 그들 중 가장 천한 자, “음탕한 창기 논개였다. 그들이 왜 그녀를 선택했는지 남아 있는 자료들이 없어서 알 수 없다. 논개는 자신의 죽음을 스스로 선택했다. 그녀의 선택은 인간이 스스로 존엄을 지키는데 필요한 것은 그의 나이, 직업, 지식, 재산, 신분이 아니라 것을 보여줬다. 논개는 숭고하고 거룩하지 않아도 모든 사람은 존중받을 가치가 있음을 그녀는 자신의 죽음으로 보여줬다.

 

사회로부터 거룩하고 존귀한 자로 대접받던 자들이 공동체를 앞장서서 지켜야 할 자신들의 임무를 방기하고 적들에게 끌려가 그 대단한 목숨을 연명하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팔 때, 공동체의 가장 미천한 음탕한 창기는 자신의 삶을 결정했다. 그것이 순국이라는 이름의 공동체를 위한 행동인지 참혹한 전쟁에 휩쓸려 어쩔 수 없이 선택한 것이든 그녀는 공동체의 적에게 타협하지 않는 결정을 내렸다.

 

그녀의 이 결정은 300년이 지나 진주 기생 산홍에게 이어졌다. 을사5적 이지용의 첩이 되어라는 요구에 대해 산홍은 첩은 비록 하찮은 기생이나 사람 구실을 하며 사는데 어찌 역적의 첩이 되겠습니까?”라고 답했다.

 

남강위에 떠 있는 의암은 오늘도 우리에게 묻는다.

너희는 사람 구실을 하고 있느냐?”

 

* 자료는 김수업의 논개”(2001, 지식산업사), 진주문화원의 논개사료조견표를 참조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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