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개'에 해당되는 글 3건

  1. 2015.06.01 진주성 관련 정보 현황
  2. 2015.05.20 논개제
  3. 2014.09.03 진주기생 논개

2014년 진주성 관련 정보 현황

 

1. 석성건립연도

() 설명없음 : 두산백과

() 1377 : 한민족문화대백과사전

() 1379 : 진주시, 문화재청, daum 문화유산 사전, 위키백과

() 1437 : 브리태니커

 

2. 성둘레 : 내성(1.7km)과 외성(4km)

() 모두 설명 : 두산백과, 위키백과

() 내성만 설명 : 문화재청, daum 문화유산 사전, 진주시청

() 외성만 설명 : 브리태니커, 한민족대백과 사전

 

3. 성넓이

() 168,944: 한국민족문화대백과원

() 173,036: 두산백과, 문화재청

() 171,480: 진주시홈페이지

() 176,804: 진주시 관광안내 책자 및 홍보물

 

4. 정보오류

포털검색 결과

() naver : 지식백과 1088, 블로그 32,176

() daum : 백과사전 3(브리태니커, 위키백과, 문화대백과사전), 블로그 41(1건은 분류오류), 감상평 2

() naver 전수조사 못함. 구글 검색 필요함

 

디지털진주문화대전

() 진주성 관련 내용이 독립항목으로 검색 안됨.

() 검색된 진주성은 같은 이름의 노래에 대한 해설.

() 하위 항목 중에 나오는 진주성 정보 중, 성의 둘레, 넓이 정보 없음.

() 복원사업이 1984년에 마무리되어 현재의 모습 갖춘 것으로 나옴.

() 창열사와 창렬사의 검색내용이 다르며 창렬사로 검색해야 건물의 내력을 알 수 있음. 문화재청과 진주시는 창열사로 되어 있음.

() (5)진주성관련 주요논란 참조

 

daum 문화유산 사전, 지도

() 공사중 공북문 사진

() 문화재 설명에 용다리전설이 포함되어 있음.

() 블로거 리뷰 41(20105월부터~20147) : 1건은 분류 오류, 블로거 주용 내용은 아래와 같음

- 의암가는 길 위험, 진주성 정문 공북문,

- 문화재청 자료에 창렬사로 검색안되고 창열사로 검색됨.

- 창렬사 39위 모심

- 호국의 종 설명없음.

- 유홍준 : 성벽내부는 조선시대 읍성과 다르게 복원되어 있다. 석축은 조선후기에 쌓은 것으로 보인다. 성내 가변쪽 길을 찍고 경남도청 있었던 자리라고 설명함.

 

브리태니커

진주는 고려 말기부터 왜구의 노략질이 심해 방어시설의 보완이 시급했는데 그후 성벽 축조가 시작되어 1437(세종 19)에 성을 새로 쌓아 완성시켰다. 이때에 3개의 못물을 성 북쪽에 모이게 하고, 그 사이에 참호를 파서 적의 접근을 막는 일종의 해자(垓字) 구실을 하게 했다.

-- 임진년 대첩만 설명함.

 

위키백과

() 최경회의 후처이던, 논개도 적장 게야무라 로쿠스케를 껴안고 남강에 투신하여 그 의개를 떨쳤다

() 연혁에서는 “1975년에는 공북문 복원 공사를 마치고, 현재의 모습을 모두 갖추게 되었다.” 훼손과 복원에서는 “2002년 공북문을 복원

() 1896(건양 원년) 8월부터는 경상남도관찰사의 감영이 촉석루 앞에 건립되었다

() 최경회의 첩 논개는 그해 77(칠월 칠석) 촉석루에서 승리를 자축하는 연회를 열기 위해 기생을 소집한다는 방을 보고, 하늘이 주신 설욕의 기회라 생각하고 기녀 행세를 하고 축하연에 들었다.

() 77일 논개부인은 곱게 화장하고 화려한 옷을 입고 열 손가락에 가락지를 끼고 들어갔는데, 전설에 의하면 논개가 열 가락지를 낀 것은 왜장을 껴안되 풀어지지 않게 하려고 했다 한다. 연회에 참석하여 게야무라 로쿠스케 등 일본군 장수들이 술에 크게 취하자 춤을추며 연회장에서 빠져나와 남강이 내려다 보이는 높은 바위로 왜장을 유인해 혼신의 힘을 다해 왜장의 허리를 껴안고 남강으로 투신 자결하였다.

 

한민족문화대백과사전

() 다음해 6월에는 왜군 4만 여명이 진주성을 공격(10만명임)

() 1377년에 다시 돌로 쌓은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2년 뒤에 왜구의 침입으로 무너지자 우왕 6(1380)에 다시 쌓아 완공되었다.

() 진주성은 고려 말 이후 조선시대에 여러 차례 고쳐 쌓았던 축성 방법의 변천 과정을 살필 수 있는 중요한 유적이다. 또한 임진왜란의 산 역사를 담고 있는 성으로, 당시의 무기, 화약 등 국방사 연구에 필요한 자료를 갖춘 성으로 알려져 있다.(여러 차례 고쳐 쌓았으나 남아 있는 자료가 없어서 축성 방법을 알 수 없음)

 

진주성 안내문

() 김시민 : 적탄에 맞고 경상우도병마절도사에 임명된 후 진주성에 순절함(김시민은 순절 후 고향으로 시신 운구 중 경상우도병마절도사 임명장 받음, 김시민은 죽기 전에 자신이 임명된 사실을 몰랐음. 오해의 소지가 있음.)

 

 

5. 진주성 관련 주요 논란

 

() 논개

진주문화대전을 비롯한 여러 곳에 논개가 장수에서 태어났고 본관이 신안이며 씨이고 김천일의 첩(또는 정실부인)이라는 주장이 있다. 이는 모두 허구이다. 김수업 교수님이 작성하신 글 외에 대전의 다른 글들은 신뢰하기 힘든 것들이 많다. 따라서 그녀의 신상에 대해 거론하면 문제가 된다.

 

() 진주성

석성 건립연도, 증축문제 등이 주요논란거리이다.

진주문화대전에는 “1930년대 많이 허물어졌다라는 내용이 있으나 1910년 경남일보의 보도에 따르면 1910년대에 일본이 경술국치 후에 바로 외성을 허물어 대사지를 메웠다. 따라서 1930년대에 허물어진 것은 내성을 말한다.

 

() 삼장사

진주문화대전의 촉석루중삼장사기실비에서는 삼장사를 김성일, 조종도 이로라 적혀있고 삼절사와 다르다고 나와 있다. 진주문화대전의 고종후편에서는 김천일, 최경회, 고종후를 삼장사 칭하고 있다. 일각에서는 김천일(도절제사), 최경회(경상우병사), 황진(충청병사)’으로 보기도 한다.

 

() 충민사

진주의 충민사는 철거되어 없는데 고종후, 김시민 등이 배향되어 있는 것으로 나온다. 충민사는 김시민을 배향하기 위한 곳이다. 김시민, 고종후 등은 창렬사에 배향되어 있다. naver에는 충민사로 검색하면 김시민장군 충민사가 지도에 나오는데 충북 괴산에 있으며 19761221일 충청북도기념물 제12호로 지정되었다.

 

() 산홍

이지용이 자신의 첩이 되어 달라는 요청을 거부한 산홍을 때렸다라는 기사가 나오는데 그 뒤 죽음에 대한 이야기는 논란거리다. 자결했다는 이야기도 있고(진주문화대전 강동욱) 이지용에게 맞아 죽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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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개제

역사 2015. 5. 20. 12:35

논개제

 

논개영정 - 논개사이버박물관

 

522일부터 24일까지 진주성 일원에서 논개제가 열린다. 논개제는 의암별제진주탈춤한마당을 주축으로 만들어진 봄축제이다. 진주탈춤한마당은 올 해 18회째 열리는 행사이며 의암별제는 1868년 진주목사 정현석이, 임진왜란 이후 진주기생들이 지내고 있던 논개제사를 정리하여 국가제향으로 만든 것이다. 공식 제례 중 유일하게 여성이 제관을 맡는 제사이며 종묘제례와 춘추제례 외에 음악이 사용되는 유일한 제례이다.

 

논개를 기리는 이 제사는 1651년에 이미 연례행사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오두인의 기록에 따르면 매년 629(음력), 진주성이 함락되던 날, 진주 사람들은 강가에 제단을 만들고 의로운 넋에 제사를 올렸다. 민중들이 자신들의 천하디 천한 딸을 기억하기 위해 지내던 이 제사는 천한 기생이 의기가 되고 의기사가 만들어져 국가에서 봄, 가을에 정식제사를 올리게 된 이후에도 계속 됐다. 일본에 의해 강제합병된 이후, 국가에서 주관하던 제사는 진주권번의 기생들이 다시 지내게 되었고 진주 기생들은 이 제사를 위해 전국의 예술가들을 진주로 불러들였다.

 

광복 후 논개 제사를 본, 시인 정지용은 호화 삼엄한 예술제”, “어린 기녀들이 논개제에서부터 배우고 체득하는 서럽고도 아름다운 전통이라 표현했다.

 

 

의암별제 - 논개사이버박물관

 

호화 삼엄한 예술제는 임진왜란 이후 진주 기생들이 시작했다. 진주 기생들은 논개를 기억하기 위해서 강가에 큰 제단을 쌓았고 아름다운 가무를 추었으며 거지들과 빈농들에게 음식을 나눠줬다.

 

1980년대에도 기생 제삿날이 되면 시내는 공기조차 무거워졌었고 아이들은 외출을 금지 당했다. 남강가 백사장에서 항상 놀던 철없는 아이는 누구인지 모르는 이상한 아줌마 때문에 모여드는 위험한 사람들이 많다고 부모에게 외출금지를 통보받았다.

 

30년이 지난 지금도 억울하기 짝이 없는 그 소년은, 기생이 뭔지 임진왜란이 뭔지도 몰랐으니 욕을 하고 싶어도 욕을 할 대상이 없어서 죄없는 방바닥만 두들겼다.

 

그 철딱서니 없는 소년에게 논개에 대한 제사가 적어도 400년은 넘었으며 어쩌면 500년도 넘게 계속되어온 행사이며 의로운 죽음을 함께 기억하기 위해 천하고 가난한 자들이 만든 이 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축제였음을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았다.

 

다가오는 주말 아이들과 함께 의로움을 기억하고 죽음을 노래하며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 이야기하며 즐기시길 바랍니다.

 

슬픔을 축제로 만든 곳,

 

진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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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기생 논개

역사 2014. 9. 3. 13:32

진주기생 논개

 

  ------------ 참고 사진, 사료들은 다음에 시간나면 올리겠음. 언제 시간날지 모림. --------------------

논개만큼 유명하면서 논개만큼 그 삶을 알 수 없는 역사인물을 찾기도 쉽지 않다. 논개는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으나 그 대부분이 소설에 가깝다. 그녀가 언제 태어나서 몇 살에 죽었으며 그 부모가 누구이며 고향은 어디인지, 어떻게 살았는지 전혀 알 수 없다. 그녀에 대한 증언은 유몽인의 어우야담에 전언으로 나오는데 그녀의 죽음만을 알 수 있을 뿐이다. 남겨진 자료가 없기 때문에 그녀에 대한 연구는 매우 미흡하다. 그녀에 대한 연구논문보다 그녀에 대한 소설(또는 상상력의 결과물에 대한 연구)이 더 많은 역사인물이 논개이다.

논개에 대한 이야기들 중 대부분이 허구인 상황에 대해서 박노자는 그의 논문 임진왜란과 의기(義妓)전승전쟁, 도덕, 여성에서 논개의 신격화라 표현했다. 박노자가 신격화라 표현할 만큼 그녀의 삶은 알려진 것이 없으나 그 죽음은 충격적이라 많은 사람들의 상상력을 자극해 왔다. 이 글도 논개의 삶을 명쾌하게 밝힐 수는 없으며 그녀가 죽음을 통해서 표현하려 했던 바를 찾아보려 한다.

 

논개의 죽음이 진주 외부에 최초로 알려진 것은 유몽인에 의해서다. 유몽인은 임진왜란 당시 세자였던 광해군에 의해 삼도순안어사’(1593. 충청, 전라, 경상도를 돌아다니며 살피는 어사)로 임명되어 진주에 왔고 이 때 논개의 이야기를 들었다. 유몽인은 논개의 이야기를 동국신속삼강행실도”(1617. 충신, 효자, 열녀에 대해 기록한 책)에 넣고자 했으나 관기를 충신이나 열녀 부문에 넣을 수 없다는 반대의견 때문에 국가의 공식 기록에 논개를 넣을 수 없었다. 논개는 음탕한 창기이기 때문에 국가로부터 외면 받았고 이에 대해 유몽인은 거룩하지 않으면 충성이 아니냐라고 물으며 그녀의 이야기를 어우야담’(1621)에 남긴다.

신분이 천한 것들은 숭고할 수 없기에 그 죽음도 국가로부터 인정받지 못하고 야담이 되었고 후대의 사람들은 그것이 실제로 있었던 일이냐며 반문하거나 신격화하는 이야기들을 만들어냈다.

 

유몽인 이후 논개에 대한 기록은 1629년 정대륭이 논개가 순국한 바위를 의암이라고 쓴 것과 1651년 오두인이 의암기를 쓴 것이 전부다. 논개의 죽음이 다시 논쟁거리가 된 것은 그녀가 죽고 128년이 지난 1721년이다.

 

1721년 경상우병사로 진주에 부임한 최진한은 진주 사람들의 하소연을 듣고 비변사로 논개를 포상해 달라는 보고를 한다. 이에 비변사는 왕에게 보고하고 이듬해(1722)근거할 만한 기록을 보내라고 한다. 그러나 130년전에 죽은 천한 기생의 기록은 찾을 수 없었기 때문에 진주사람들은 유몽인의 증언과 유사한 논개에 대한 이야기를 돌에 새겨 올려 보냈다.(의암사적비)

이에 정부는 논개의 죽음이 거룩하다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이를 보답할 것을 알리며 자손을 찾아서, 별도로 부역을 면제시켜 주고 이제까지 하지 못했던 나라의 특별한 은전을 보이도록 하라는 지시를 내린다. 경상우병영은 정부의 지시를 이행하기 위해서 관할하는 관청에 논개의 자손을 찾아보라는 공문을 보내지만 찾을 수 없다라는 답변만 받았고 이 보고에 대해서 정부는 아무런 답이 없었다. 이때 논개는 공문에 처음으로 음탕한 창기’, ‘관기가 아닌 의기로 기록되었으나 그녀는 다시 잊혀졌다. 임금이 바뀌자 최진한은 다시 상소를 올렸지만 이에 대한 영조의 답변은 쌀쌀했다. “처음에 구별을 둔 것에 반드시 까닭이 있었을 터이다. 야담에 적혔으나 어찌 믿을 수 있겠는가? 또 백여 년이나 지난 일이라 가볍게 처리할 수 없다.”

 

가볍게바뀔 수 없었던 논개에 대한 영조의 입장이 바뀐 것은 이십년이 다 되어가는 1740년이다. 경상우병사 남덕하가 영조에게 장계를 올려 의기에게 사당을 세워 포상하기를 청하여 마침내 허락을 받았다. 논개는 죽은 지 147년만에 국가로부터 그 공적을 인정을 받았다. 이를 주도했던 경상우병사 남덕하가 이인좌의 반란을 진압한 일등공신이었기에 가능했다는 주장은 너무도 서글픈 또 다른 역사의 모습이다.

 

한 세기를 훌쩍 뛰어넘는 그 오랜 시간동안 논개는 잊혀지지 않았을까? 제대로 된 역사기록도 없고 정부도 인정하지 않았고 자식도 일가친척도 없는 그녀는 어떻게 사람들의 기억 속에 남아 있었을까?

 

논개를 기리는 제사는 1651년에 이미 연례행사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오두인의 기록에 따르면 매년 629, 진주성이 함락된 날, 진주사람들은 강가에 제단을 만들고 의로운 넋에 제사를 올렸다. 이 제사는 영조대에 의기사가 만들어지고 봄, 가을에 제사를 올리게 된 이후에도 계속 지냈다. 광복 후 논개 제사를 본, 시인 정지용은 호화 삼엄한 예술제”, “어린 기녀들이 논개제에서부터 배우고 체득하는 서럽고도 아름다운 전통이라 표현했다.

 

왜 진주사람들은 침략군 한 명(논개소이영지論介笑而迎之 왜장유이인지倭將誘而引之)을 껴안고 강물에 투신한 음탕한 창녀를 수 백년 동안 기억하기 위해서 노력했을까? 임진왜란 때, 진주에서 죽은 숭고하고 거룩한 자들이 수십 수백이며 그들보다 덜 숭고하지만 음탕한 창기보다는 비천하지 않은 수만명의 양민들이 죽었다. 촉석루 앞 남강은 투신 사람들의 시체로 강물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그 많은 사람들 중에 왜 하필 음탕한 기생 논개를 수 백년 동안 기억하려 노력했을까?

 

어떤 사람은 진주사람들의 기억과 유몽인의 기록에 착오가 있었을 수도 있다고 주장한다. 어떤 이들은 꾸며진 것이라 주장한다.

 

논개에 대한 대부분의 이야기는 꾸며진 것이 맞다. 1722년 공문을 통해서 국가기관을 동원하여 찾아보려 노력을 했으나 등장하지 않았던 그녀의 자손은 1740년 의기로 공식 인정받은 10년 후인 1750년에 처음 등장하게 된다. 이 때 논개는 진주성에 죽은 최경회의 첩이 된다. 논개는 음탕한 창기에서 첩실이지만 사대부의 부인으로 신분이 상승한다. 반세기 후에는 고향도 갖게 된다. 1799년 발간된 호남절의록에 장수 사람으로 등장한다. 이후 다시 반세기 정도 지난 1846년 장수현감 정주석은 촉석의기논개생장향수명비를 세워 논개의 고향을 장수로 공식화한다. 1872년에는 장수현읍지를 통해서 장수현 임현내면 풍천마을이 논개의 고향으로 밝혀진다. 그리고 다시 백년이 흘러 1977년 함양군은 의랑 논개를 펴내며 함양군 서상면 금당리 방지마을에 논개의 무덤이 있다고 밝힌다.

 

국가로부터 의기로 인정받은 이후에 등장한 경천동지할 역사발굴의 결과들 덕분에 논개는 천한 기생에서 거룩한 신화가 되었다.

 

그러나 우리가 논개의 죽음을 이해하기 위해 봐야 할 것은 그녀에 대한 신화가 만들어지 지기 시작한 이후가 아니라 그 앞이다. “의기 논개가 되기 이전 한 세기가 넘게 진주의 관기들에 의해서 이루어진 그녀의 제사에 대해 생각해 보자.

 

전태일은 노동자의 인간다운 삶을 보장하라며 죽었지만 전국의 공장 중 그의 기일에 제사는커녕 묵념을 올리는 사업장을 찾아보기 어렵다. 관기(관청에 소속된 기생)는 현재의 노동자들보다 수백배는 더 어려운 처지에 있었고 가장 신분예속이 심했다. “백정은 기생들도 안받는다라는 말 속에 이 두 신분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어떠했는지 알 수 있다. 변사또가 제일 먼저 한 일이 관기들 확인이었다.(점고)

 

그러나 논개의 제사는 관기들이 주최했다. 기생들이 기생의 제사를 위해서 강가에 큰 제단을 쌓고 아름다운 가무를 추고 거지들과 빈농들에게 음식을 나눠줬다. 그녀의 죽음이 실제보다 과장된 것이라면 그런 일이 가능했을까? 필자가 초등학교 다니던 1980년대 초반만 해도 629기생 제삿날이 되면 시내의 공기조차 무거워졌고 외출을 금지 당했다. 남강가에서 항상 놀았던 그 초딩은 누구 인지 모르지만 밖에 놀러 나가지도 못하게 한다고 죽은 사람 욕을 해대며 방바닥에 화풀이를 했다.

 

2007년 박노자의 논문이 논개 이야기가 만들어진 것으로 진주에 알려지고 이에 대응하기 위해 진주의 유력인사들이 모였다. 그 자리에서 나이 지긋하신 진주 사족의 후예는 우리 어르신들이 할 일이 없서 기생년 이야기나 만들고 다녔을까?”라는 입장을 밝혔다.(당시 필자가 서울에 가서 박노자를 만나 사실 확인을 해야 하는 임무를 맡았기에 그 자리에서 동네 어르신들의 여러 가지 이야기를 경청해야 했다.)

 

150년만에 국가로부터 죽음을 인정받은 논개의 이야기는 계속 확장되었고 논개가 죽은지 400년이 지났으나 그녀의 이야기는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그녀가 죽은지 400년만에 그녀의 무덤까지 발견되었으니 앞으로 50, 100년 후에 논개에 대한 새로운 무엇이 발견되더라도 그리 놀라운 것은 아니리라.

 

지금까지 만들어졌고 앞으로도 꾸준히 만들어질 논개에 대한 수많은 전설과 상상들은 그저 이야기꺼리일 뿐이다. 우리가 소설이 아닌 역사로서 논개에 대해 기억해야 할 것은 임진왜란을 겪었던 진주사람들이 논개의 죽음을 통해서 전달하고자 했던 것이 무엇일까 하는 것이다.

 

진주를 끝까지 지킬 것이라는 임금을 말을 믿고 7만명의 사람들이 진주성에 들어왔고 학살당했다. 권율이 지휘한 국왕의 군대는 일본군의 병력에 놀라 전라도로 철수했고 명나라의 군대는 일본군과 협상하며 진주를 포기했다. 10만의 침략자들에게 포위된 진주성은 10일을 싸웠으나 하늘조차 진주사람들을 버렸다. 큰 비로 활줄은 늘어지고 성벽은 큰 물살에 흘러내렸다.(1591년에 실시한 부실한 진주성 확장공사 때문에 성벽이 무너졌으나 당시 진주 사람들에게는 하늘이 버린 것으로 이해됐을지도 모른다.) 홍의장군 곽재우는 진주성을 비울 것을 주장하며 입성하지 않았고 방어를 책임진 장수들은 서로 헐뜯기 바빴다. 방어하는 장수들의 문제점을 지적한 늙은 기생은 목이 잘렸다.

 

참혹한 학살의 현장, 버림받은 자들의 대지에 7만명 중 가장 힘없고 천한 자에 속한 여성이 스스로의 삶을 결정하기 위해서 일어섰다. 일본의 지배자 토요토미 히데요시로부터 진주성에 살아있는 모든 것을 죽이라는 명령을 받은 학살자의 군대도 그녀가 위암(危巖, 논개 사후 의암義巖)걸어가는 길을 막지 못했다. 국왕의 대리자들로부터 받은 것은 술잔과 멸시와 정액뿐인 그녀가, 유몽인의 주장처럼 국왕에서 충성을 다하기 위한 목적으로 학살자와 함께 죽기 위해서 그 위험천만한 길을 걸어갔을까?

 

참혹한 전쟁을 겪은 사람들이 전쟁의 교훈을 잊지 않기 위해서 선택한 사람이 그들 중 가장 천한 자, “음탕한 창기 논개였다. 그들이 왜 그녀를 선택했는지 남아 있는 자료들이 없어서 알 수 없다. 논개는 자신의 죽음을 스스로 선택했다. 그녀의 선택은 인간이 스스로 존엄을 지키는데 필요한 것은 그의 나이, 직업, 지식, 재산, 신분이 아니라 것을 보여줬다. 논개는 숭고하고 거룩하지 않아도 모든 사람은 존중받을 가치가 있음을 그녀는 자신의 죽음으로 보여줬다.

 

사회로부터 거룩하고 존귀한 자로 대접받던 자들이 공동체를 앞장서서 지켜야 할 자신들의 임무를 방기하고 적들에게 끌려가 그 대단한 목숨을 연명하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팔 때, 공동체의 가장 미천한 음탕한 창기는 자신의 삶을 결정했다. 그것이 순국이라는 이름의 공동체를 위한 행동인지 참혹한 전쟁에 휩쓸려 어쩔 수 없이 선택한 것이든 그녀는 공동체의 적에게 타협하지 않는 결정을 내렸다.

 

그녀의 이 결정은 300년이 지나 진주 기생 산홍에게 이어졌다. 을사5적 이지용의 첩이 되어라는 요구에 대해 산홍은 첩은 비록 하찮은 기생이나 사람 구실을 하며 사는데 어찌 역적의 첩이 되겠습니까?”라고 답했다.

 

남강위에 떠 있는 의암은 오늘도 우리에게 묻는다.

너희는 사람 구실을 하고 있느냐?”

 

* 자료는 김수업의 논개”(2001, 지식산업사), 진주문화원의 논개사료조견표를 참조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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