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덕경과 진주의 정신대할머니
아래의 글은 7월6일(월) 저녁 7시 진주인권교육센터(센터장 권춘현)가 진주시 평거동 진주여성민우회에서 같은 주제로 주최하는 모임에서 이야기할 내용이다. 글은 진주참여연대 지방자치위원장인 심인경이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에서 제공받은 자료를 토대로 재구성했다.
공부하며 돈 벌러간 정신대, 그곳은 공장노예
위안부 화가로 알려진 강덕경은 1929년 2월 경남 진주시 수정동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일찍 돌아가시고 어머니는 재혼하여 외가에서 자랐다.
집 가까이 봉래초등학교가 있었지만 진주초등학교(당시 요시노(吉野)보통학교)에 다녔으며 31회 졸업생이다. 초등학교 졸업 후 집에서 놀고 있는 딸이 보기 안스러웠던 강덕경의 어머니가 그 무렵에 새로 생긴 요시노보통학교 고등과에 딸을 입학시켰다. 고등과는 한 반 뿐이었고 학생은 60여 명 정도였다. 1944년 1학년에 다닐 때, 일본 남자 선생님이 집에 와서 돈 벌러 일본에 가라고 권유했다.
강덕경의 어머니는 안 된다고 우셨으나 강덕경은 배우며 돈을 벌 수 있다기에 가기로 했다. 같이 학교를 다니던 반장과 강덕경이 여자근로정신대 1기생으로 마산에서 모인 50명, 진주 50명, 다른 곳에서 모인 50명과 함께 부산 도청 앞에서 발대식(壯行會)를 가진 뒤 연락선을 타고 일본으로 떠났다. 배 양쪽에 군함이 두 대, 비행기 두 대가 따라왔고 배는 3층이었는데 강덕경 일행은 제일 아래층에 머물렀다.
자유를 위하여...
공장에 온지 두 달만에 배가 너무 고파 진주에서 함께 온 친구와 도망을 쳤다. 공장 인근에 있는 조선인 집으로 새벽에 도망을 갔으나 어떻게 알고 왔는지 기숙사에서 나온 사람들에게 붙잡혀 갔다. 얼마후 진주에서 다시 50명이 왔고 그 중에 친척 강영숙이 끼여 있어 꾸짖었다.
너무 힘든 공장생활을 벗어나고자 친구와 다시 도망칠 계획을 세웠다. 과도한 노동으로 햇빛을 보지 못한 여공들의 비타민D 부족을 염려한 관리자들이 근로정신대 여성들을 단체로 공장 주변을 걷게 했는데 그녀들은 그 시간에 건물의 구조와 경계상태를 기억해서 탈출계획을 세웠다. 앞서 탈출한 방향과 반대방향으로 철조망을 뚫고 탈출을 했으나 곧 길을 잃고 군인에게 체포되었다. 체포된 후에 트럭에 실려 다음 날 새벽쯤 어딘지 모르는 부대로 이송되었고 그 부대에서 해방될 때까지 위안부 생활을 했다.
위안부, 살아남기 위해
부대에는 5명 정도 여성들이 있었고 천막집에서 생활했다. 천막집은 칸이 대여섯개로 나뉘어져 있었으나 잠은 군용 간이침대에서 여자들끼리 잤다. 하루에 10명 정도 군인이 왔고 토요일 오후부터 많이 왔다. 다른 부대에서 오면 밤에 나가야 했는데 너무 당해서 밑이 아파서 걸음을 못 걸으면 군인들이 끌다시피 천막으로 데리고 왔다. 음식은 군대에서 갖다 주었는데 주먹밥을 먹었다. 흙바닥에 상을 놓고 쪼그리고 앉아서 먹었다. 부대가 이동할 때 여자들도 군인들과 같이 트럭을 타고 어두울 때 이동했다.
두 번째 장소는 차를 타고 하루도 안걸렸다. 이동한 부대 근처에는 연못인지 강인지 알 수 없는 것이 있었고 나무도 많았으며 인가도 제법 있었다. 강덕경 일행이 도착한 부대에는 여성이 20명 정도 있었고 하루에 대여섯명 정도 받았으나 돈이나 (전)표같은 것은 없었다. 같은 건물에서 만난 서른이 넘은 복순언니는 “우리 돈은 저 놈의 새끼(군속)가 다 가지고 있다.”라고 말하며 “너는 군인들에게 잡혀 와서 돈도 못받고 불쌍하다.”라고 강덕경에게 말했다. 강덕경은 그곳에서 도망가기 위해서 자신을 잡아온 고바야시에게 잘 보이려 노력했으나 소용이 없었다. 고바야시와 복순언니 외에는 말을 하지 않았고 항상 움츠리고 다녔다. 많은 남자들이 오는 토요일이 죽기보다 무서웠고 도망가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마츠시로 위안소》
해방, 귀국
45년 해방 후 할머니는 신미나도(처음 도야마 공장에서 일할 때 도망쳤던 곳)로 돌아와서, 처음 도망쳤을 때 밥을 주었던 방씨 아저씨 집에서 일해주고 같이 귀국했다. 귀국하던 배에서 임신한 사실을 알아 현해탄에 빠져 죽으려 했으나 죽지 못하게 계속 아주머니가 따라다녔다. 가족과 같이 남원에 있다가 46년 1월경에 애기를 낳았고 46년 봄에 진주 집에 돌아왔다. 그러나 강덕경의 어머니는 애까지 딸린 처녀를 집안에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 대신 부산으로 가서 살게 했다. 부산에 살면서 아이는 천주교에서 운영하는 고아원에 맡겼다. 식당에 일하며 일요일마다 아이를 만나러 갔다. 그러던 어느 날 자신의 아이가 입고 있던 옷을 다른 아이가 입었길래 알아보니 아이가 폐렴으로 죽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그 때 강덕경의 아이가 네 살이었는데 그녀는 아이의 주검을 직접 보지 못했기에 죽을 때까지 아이의 죽음을 믿지 않았다. 이후 식당일, 장사, 남의 집일, 하숙치기 등을 하며 평생 결혼하지 않고 살았다.
고통도 투쟁도 끝나지 않았다.
귀국 후, 열여덟에 월경이 시작되었으나 월경을 할 때마다 이틀씩은 방을 헤매고 다녔다. 마흔이 되기 전에 월경이 끊겨 잠시 몸이 좋아졌으나 방광에 이상이 생겨 입원을 자주 했다. 평생 동안 병으로 고통받았고 몸과 마음의 고통을 잊기 위해 술과 담배로 지세웠다. 지난 1997년 2월 2일 폐암으로 별세했다. 그녀는 일본으로 가서 증언하고 일본정부의 사과를 받기 위해 병상에서도 마지막까지 여권을 찾았다.
강덕경은 자신 같은 인생을 후세가 겪지 않게 하기 위해 자신의 경험을 공개적으로 밝혔다. 그녀의 삶은 결코 한국의 수치가 아니며 그녀의 삶에 대한 일본의 사죄와 배상을 모두 받아내는 것은 그녀의 인간다운 삶을 지켜주지 못한 우리 사회의 의무이다.
아사히신문은 일본인 저널리스트 도이 도시쿠 씨는 2015년 4월 그림으로 일제의 만행을 고발해온 군 위안부 출신 고 강덕경 할머니의 일생을 다룬 책 '기억과 함께 사는 전 위안부 강덕경의 생애'를 발간했으며 도이 도시쿠 씨는1990년대 중반 2년간 강덕경을 포함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7명을 취재하며 찍은 다큐 영화 '기억과 함께 산다'를 6월7일부터 도쿄 히비야 컨벤션홀에서 상영했다.
아래는 강덕경 할머니를 제외한 진주와 연관이 있는 정신대 할머니들의 명단이다.
《진주의 정신대 할머니들》
이름 |
주소 |
본적 / 끌려간 장소 |
진주 지역과 관련 내용 |
하순녀 |
부산 |
진주 / 광주 |
출생은 진주에서 했으나 바로 목포, 영암으로 이사. 영암의 기억이 많음. 돌아와서도 영암 집으로 갔고, 광주에서 남의집살이. |
손판임 |
서울 노원구 |
삼천포/ 하동 |
출생 하동, 진주로 이사, 돌아와서도 진주로. |
최순월 |
함양 |
함안 / 진주 본성동 |
진주 본성동에서 살다가 과부가 되었고, 위안부로 끌려감. 돌아와서 진주로. |
배영자 |
전남 여수 |
하동 |
경남 하동으로 시집가서 살던 중 남편 외도 심해서 진주로 가출. 진주에서 끌려감. 돌아와 하동으로. 남편이 죽고 여수로. |
김경애 |
창원 |
마산 / 진주 옥봉동 |
진주시 옥봉동에서 부모님과 어렵게 살면서 진주봉래국교 졸업 후 품팔이를 하고 있는데 43년 1차 정신대 징집이 시작되어 개성 고모집에 피신하여 징립을 모면했으나, 44년 진주 봉래동(옥봉동) 사무소 직원들이 강제로 끌고 감. 귀국 후 진주 부모님에게로. |
이우율 |
부산 |
옥봉동 |
진주시 옥봉동 살 때 공장 직공 모집한다고 하여 응모. 귀국 후 진주 남동생 집 |
임정자 |
창원 |
산청 /충무 태평동 |
진주에서 장녀로 태어나 5살 때 부모님 따라 부산으로 이사. 충무 태평동으로 이사. 그곳에서 끌려감. 귀국 후 충무 집으로. |
김연이 |
부산 |
부산 기장 / 전남 고흥 |
귀국 후 진주로 갔는데 부모님 돌아가셔서 평남으로 감. |
강도아 |
진주 |
산청 / 하동 |
귀국하여 살고 계시던 곳이 진주 |
김순이 |
진주 |
하동 |
진주로 귀국, 고향 하동으로. 89년부터 진주 거주. |
※7월 6일 이야기할 내용
1. 강덕경과 진주의 정신대 할머니들에 대해 알기
2. 어떻게 할머니들을 기억할 것인가?
1) 할머니들에 대한 사료 정리와 발굴
2) 어떤 일들을 할 수 있을까?
3) 기념사업을 위한 시민모임 결성 여부
3. 그 외 함께 이야기할 내용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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