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성
진주는 5세기 경에 남쪽의 중요한 고을 중 하나였으며 백제 때 거열성에 속해 있었고 신라 신문왕 5년(685년) 청주가 설치된 이래 1925년 경남도청이 부산으로 이전될 때까지 경남지방의 수부도시였다. 경덕왕 때 강주(747년)로 고쳤으며 고려 성종 때 목을 설치하여 진주(995년)라 고치고 절도사를 설치했다.
고려 때 성곽은 토성이었는데 1379년(고려 우왕 5)에 돌로 성을 쌓았다. 이때 성은 이름을 촉석성이라 했는데, 진주성은 처음부터 치소를 중심에 두고 그 외곽을 감싸는 일반적인 읍성과 달리 치소에서 떨어진 별도 위치에 강과 언덕으로 이루어진 지리 이점을 살려 지은 성곽인 점이 주목된다.
진주성은 16세기말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대체로 고려 말 석성으로 쌓은 모습에서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그 둘레는 대략 2,036m인데 현재의 진주성 내성 둘레인 1,700m보다 약간 큰 규모이다.
진주성은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한 해 전인 1591년(선조 24)에 경상도관찰사 김수에 의해 성을 확장하였으며 현재의 장대동 놀이터 부근에 동문이 있었다. 그러나 이 때 동쪽으로 확장한 부분은, 물이 나고 습한 곳이어서 성벽이 취약하여 1593년(계사년) 제2차 진주성 전투에서 성벽이 무너지며 진주성 함락의 원인으로 작용했다.
경상우병사 이수일이 1603년(선조 36) 무너진 진주성을 쌓기 시작하여 1605년(선조 38)에 축성을 완료했다. 이때는 동쪽 성벽의 위치를 안쪽으로 약간 물리고 성 내부를 내성과 외성으로 나누어 기능을 분리했으며 이를 위해 성내에 새로 성벽을 축조하였다. 1605년에 수축된 진주성은 19세기말까지 큰 변화 없이 이어져 왔다. 17세기 이후 진주성에는 내성에 내북문(공북문), 내동문(촉석문)이 있었고 외성에 서문, 구북문, 신북문, 남문이 있었다.
진주성은 일제강점기 직전 외성이 먼저 철거되고 뒤이어 내성이 철거되었으며 진주성 내성에 들어서 있던 우병영은 1894년 갑오개혁에 따라 각도 병영의 혁파와 함께 폐지되었다. 이후 우병영은 경남도청으로 이용되었으며 그 외의 군사시설은 적절한 관리가 이루어지 않은 채로 남아 있다가 일제강점기에 들어와 철거되어 사라졌다. 이후에 내성 안에도 주민들의 살림집이 들어서고 주민 거주가 늘어나면서 진주성의 본래의 모습은 완전히 사라지게 되었다.
한국전쟁으로 폐허가 된 진주성은 1960년 족석루가 재건되었고 1963년 국가지정문화재 사적 118호로 지정되었으며 전체 면적은 173,036㎡, 성곽길이는 1,760m이다. 1971년 정화사업을 통하여 본격적 복원작업이 시작되어 2002년 공북문 복원까지 이루어졌다.
《참고자료》
진주성·진주유등축제 세계유산 추진학술연구 –진주성부분-, 2015, 진주시
진주성 이야기(진주문화를 찾아서17), 2014, 김준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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