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덕경과 진주의 정신대할머니

 

아래의 글은 76() 저녁 7시 진주인권교육센터(센터장 권춘현)가  진주시 평거동 진주여성민우회에서 같은 주제로 주최하는 모임에서 이야기할 내용이다. 글은 진주참여연대 지방자치위원장인 심인경이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에서 제공받은 자료를 토대로 재구성했다.

 

 

공부하며 돈 벌러간 정신대, 그곳은 공장노예

위안부 화가로 알려진 강덕경은 19292월 경남 진주시 수정동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일찍 돌아가시고 어머니는 재혼하여 외가에서 자랐다.

집 가까이 봉래초등학교가 있었지만 진주초등학교(당시 요시노(吉野)보통학교)에 다녔으며 31회 졸업생이다. 초등학교 졸업 후 집에서 놀고 있는 딸이 보기 안스러웠던 강덕경의 어머니가 그 무렵에 새로 생긴 요시노보통학교 고등과에 딸을 입학시켰다. 고등과는 한 반 뿐이었고 학생은 60여 명 정도였다. 19441학년에 다닐 때, 일본 남자 선생님이 집에 와서 돈 벌러 일본에 가라고 권유했다.

  강덕경의 어머니는 안 된다고 우셨으나 강덕경은 배우며 돈을 벌 수 있다기에 가기로 했다. 같이 학교를 다니던 반장과 강덕경이 여자근로정신대 1기생으로 마산에서 모인 50, 진주 50, 다른 곳에서 모인 50명과 함께 부산 도청 앞에서 발대식(壯行會)를 가진 뒤 연락선을 타고 일본으로 떠났다. 배 양쪽에 군함이 두 대, 비행기 두 대가 따라왔고 배는 3층이었는데 강덕경 일행은 제일 아래층에 머물렀다.

여자근로정신대는 시모노세키를 거쳐서 도야마 현에 도착했다. 강덕경은 그곳의 비행기 공장에서 10개월 정도 일했다. 비행기 공장은 진주보다 넓은 것처럼 보였으나노동조건은 열악했다. 기숙사는 매우 컸고 한 방에 12~3명이 잤다. 그러나 이불은 요까지 포함해서 각 세 채씩만 주었다. 조선인들은 고향별로 나뉘어 방이 배정되었다. 근무시간은 12시간이었으며 밤일과 낮일을 일주일씩 교대로 했다. 임금은 받은 적이 없었다. 공장에서는 아침, 저녁만 주었고 점심은 콩떡 3개가 전부였다. 반찬은 된장국과 단무지가 뿐이라 싱거웠고 밥을 아껴 먹으려고 한 알씩 한 알씩 세며 먹기도 했다. 밤일을 마치고 오면 아침을 주고 저녁까지 아무것도 주지 않아서 너무 배가 고팠다. 저녁에 다른 방으로 가야할 음식을 몰래 가져다 먹었는데 그 방 사람들이 굶게 되는 줄도 모르고 배가 고파서 벌인 일이었다. 배가 고파서 진주에 편지를 보내자 소금과 콩을 보내와 먹기도 했고 비누를 부쳐 달라고 해서 공장에 출퇴근하는 일본인 여자들에게 주어 음식과 바꿔 먹기도 했다.

 

자유를 위하여...

공장에 온지 두 달만에 배가 너무 고파 진주에서 함께 온 친구와 도망을 쳤다. 공장 인근에 있는 조선인 집으로 새벽에 도망을 갔으나 어떻게 알고 왔는지 기숙사에서 나온 사람들에게 붙잡혀 갔다. 얼마후 진주에서 다시 50명이 왔고 그 중에 친척 강영숙이 끼여 있어 꾸짖었다.

 

너무 힘든 공장생활을 벗어나고자 친구와 다시 도망칠 계획을 세웠다. 과도한 노동으로 햇빛을 보지 못한 여공들의 비타민D 부족을 염려한 관리자들이 근로정신대 여성들을 단체로 공장 주변을 걷게 했는데 그녀들은 그 시간에 건물의 구조와 경계상태를 기억해서 탈출계획을 세웠다. 앞서 탈출한 방향과 반대방향으로 철조망을 뚫고 탈출을 했으나 곧 길을 잃고 군인에게 체포되었다. 체포된 후에 트럭에 실려 다음 날 새벽쯤 어딘지 모르는 부대로 이송되었고 그 부대에서 해방될 때까지 위안부 생활을 했다.

 

 

위안부, 살아남기 위해

부대에는 5명 정도 여성들이 있었고 천막집에서 생활했다. 천막집은 칸이 대여섯개로 나뉘어져 있었으나 잠은 군용 간이침대에서 여자들끼리 잤다. 하루에 10명 정도 군인이 왔고 토요일 오후부터 많이 왔다. 다른 부대에서 오면 밤에 나가야 했는데 너무 당해서 밑이 아파서 걸음을 못 걸으면 군인들이 끌다시피 천막으로 데리고 왔다. 음식은 군대에서 갖다 주었는데 주먹밥을 먹었다. 흙바닥에 상을 놓고 쪼그리고 앉아서 먹었다. 부대가 이동할 때 여자들도 군인들과 같이 트럭을 타고 어두울 때 이동했다.

 

두 번째 장소는 차를 타고 하루도 안걸렸다. 이동한 부대 근처에는 연못인지 강인지 알 수 없는 것이 있었고 나무도 많았으며 인가도 제법 있었다. 강덕경 일행이 도착한 부대에는 여성이 20명 정도 있었고 하루에 대여섯명 정도 받았으나 돈이나 ()표같은 것은 없었다. 같은 건물에서 만난 서른이 넘은 복순언니는 우리 돈은 저 놈의 새끼(군속)가 다 가지고 있다.”라고 말하며 너는 군인들에게 잡혀 와서 돈도 못받고 불쌍하다.”라고 강덕경에게 말했다. 강덕경은 그곳에서 도망가기 위해서 자신을 잡아온 고바야시에게 잘 보이려 노력했으나 소용이 없었다. 고바야시와 복순언니 외에는 말을 하지 않았고 항상 움츠리고 다녔다. 많은 남자들이 오는 토요일이 죽기보다 무서웠고 도망가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마츠시로 위안소

 

해방, 귀국

45년 해방 후 할머니는 신미나도(처음 도야마 공장에서 일할 때 도망쳤던 곳)로 돌아와서, 처음 도망쳤을 때 밥을 주었던 방씨 아저씨 집에서 일해주고 같이 귀국했다. 귀국하던 배에서 임신한 사실을 알아 현해탄에 빠져 죽으려 했으나 죽지 못하게 계속 아주머니가 따라다녔다. 가족과 같이 남원에 있다가 461월경에 애기를 낳았고 46년 봄에 진주 집에 돌아왔다. 그러나 강덕경의 어머니는 애까지 딸린 처녀를 집안에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 대신 부산으로 가서 살게 했다. 부산에 살면서 아이는 천주교에서 운영하는 고아원에 맡겼다. 식당에 일하며 일요일마다 아이를 만나러 갔다. 그러던 어느 날 자신의 아이가 입고 있던 옷을 다른 아이가 입었길래 알아보니 아이가 폐렴으로 죽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그 때 강덕경의 아이가 네 살이었는데 그녀는 아이의 주검을 직접 보지 못했기에 죽을 때까지 아이의 죽음을 믿지 않았다. 이후 식당일, 장사, 남의 집일, 하숙치기 등을 하며 평생 결혼하지 않고 살았다.

 

고통도 투쟁도 끝나지 않았다.

귀국 후, 열여덟에 월경이 시작되었으나 월경을 할 때마다 이틀씩은 방을 헤매고 다녔다. 마흔이 되기 전에 월경이 끊겨 잠시 몸이 좋아졌으나 방광에 이상이 생겨 입원을 자주 했다. 평생 동안 병으로 고통받았고 몸과 마음의 고통을 잊기 위해 술과 담배로 지세웠다. 지난 199722일 폐암으로 별세했다. 그녀는 일본으로 가서 증언하고 일본정부의 사과를 받기 위해 병상에서도 마지막까지 여권을 찾았다.

강덕경은 자신 같은 인생을 후세가 겪지 않게 하기 위해 자신의 경험을 공개적으로 밝혔다. 그녀의 삶은 결코 한국의 수치가 아니며 그녀의 삶에 대한 일본의 사죄와 배상을 모두 받아내는 것은 그녀의 인간다운 삶을 지켜주지 못한 우리 사회의 의무이다.

 

아사히신문은 일본인 저널리스트 도이 도시쿠 씨는 20154월 그림으로 일제의 만행을 고발해온 군 위안부 출신 고 강덕경 할머니의 일생을 다룬 책 '기억과 함께 사는 전 위안부 강덕경의 생애'를 발간했으며 도이 도시쿠 씨는1990년대 중반 2년간 강덕경을 포함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7명을 취재하며 찍은 다큐 영화 '기억과 함께 산다'67일부터 도쿄 히비야 컨벤션홀에서 상영했다.

 

아래는 강덕경 할머니를 제외한 진주와 연관이 있는 정신대 할머니들의 명단이다.

 

진주의 정신대 할머니들

이름

주소

본적 / 끌려간 장소

진주 지역과 관련 내용

하순녀

부산

진주 / 광주

출생은 진주에서 했으나 바로 목포, 영암으로 이사. 영암의 기억이 많음. 돌아와서도 영암 집으로 갔고, 광주에서 남의집살이.

손판임

서울

노원구

삼천포/ 하동

출생 하동, 진주로 이사, 돌아와서도 진주로.

최순월

함양

함안 / 진주 본성동

진주 본성동에서 살다가 과부가 되었고, 위안부로 끌려감. 돌아와서 진주로.

배영자

전남 여수

하동

경남 하동으로 시집가서 살던 중 남편 외도 심해서 진주로 가출. 진주에서 끌려감. 돌아와 하동으로. 남편이 죽고 여수로.

김경애

창원

마산 / 진주 옥봉동

진주시 옥봉동에서 부모님과 어렵게 살면서 진주봉래국교 졸업 후 품팔이를 하고 있는데 431차 정신대 징집이 시작되어 개성 고모집에 피신하여 징립을 모면했으나, 44년 진주 봉래동(옥봉동) 사무소 직원들이 강제로 끌고 감. 귀국 후 진주 부모님에게로.

이우율

부산

옥봉동

진주시 옥봉동 살 때 공장 직공 모집한다고 하여 응모. 귀국 후 진주 남동생 집

임정자

창원

산청 /충무 태평동

진주에서 장녀로 태어나 5살 때 부모님 따라 부산으로 이사. 충무 태평동으로 이사. 그곳에서 끌려감. 귀국 후 충무 집으로.

김연이

부산

부산 기장

/ 전남 고흥

귀국 후 진주로 갔는데 부모님 돌아가셔서 평남으로 감.

강도아

진주

산청 / 하동

귀국하여 살고 계시던 곳이 진주

김순이

진주

하동

진주로 귀국, 고향 하동으로. 89년부터 진주 거주.

 

 

76일 이야기할 내용

 

1. 강덕경과 진주의 정신대 할머니들에 대해 알기

2. 어떻게 할머니들을 기억할 것인가?

1) 할머니들에 대한 사료 정리와 발굴

2) 어떤 일들을 할 수 있을까?

3) 기념사업을 위한 시민모임 결성 여부

3. 그 외 함께 이야기할 내용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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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성

역사 2015. 6. 1. 14:40

진주성

 

진주는 5세기 경에 남쪽의 중요한 고을 중 하나였으며 백제 때 거열성에 속해 있었고 신라 신문왕 5(685) 청주가 설치된 이래 1925년 경남도청이 부산으로 이전될 때까지 경남지방의 수부도시였다. 경덕왕 때 강주(747)로 고쳤으며 고려 성종 때 목을 설치하여 진주(995)라 고치고 절도사를 설치했다.

 

고려 때 성곽은 토성이었는데 1379(고려 우왕 5)에 돌로 성을 쌓았다. 이때 성은 이름을 촉석성이라 했는데, 진주성은 처음부터 치소를 중심에 두고 그 외곽을 감싸는 일반적인 읍성과 달리 치소에서 떨어진 별도 위치에 강과 언덕으로 이루어진 지리 이점을 살려 지은 성곽인 점이 주목된다.

 

진주성은 16세기말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대체로 고려 말 석성으로 쌓은 모습에서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그 둘레는 대략 2,036m인데 현재의 진주성 내성 둘레인 1,700m보다 약간 큰 규모이다.

 

진주성은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한 해 전인 1591(선조 24)에 경상도관찰사 김수에 의해 성을 확장하였으며 현재의 장대동 놀이터 부근에 동문이 있었다. 그러나 이 때 동쪽으로 확장한 부분은, 물이 나고 습한 곳이어서 성벽이 취약하여 1593(계사년) 2차 진주성 전투에서 성벽이 무너지며 진주성 함락의 원인으로 작용했다.

 

경상우병사 이수일이 1603(선조 36) 무너진 진주성을 쌓기 시작하여 1605(선조 38)에 축성을 완료했다. 이때는 동쪽 성벽의 위치를 안쪽으로 약간 물리고 성 내부를 내성과 외성으로 나누어 기능을 분리했으며 이를 위해 성내에 새로 성벽을 축조하였다. 1605년에 수축된 진주성은 19세기말까지 큰 변화 없이 이어져 왔다. 17세기 이후 진주성에는 내성에 내북문(공북문), 내동문(촉석문)이 있었고 외성에 서문, 구북문, 신북문, 남문이 있었다.

 

진주성은 일제강점기 직전 외성이 먼저 철거되고 뒤이어 내성이 철거되었으며 진주성 내성에 들어서 있던 우병영은 1894년 갑오개혁에 따라 각도 병영의 혁파와 함께 폐지되었다. 이후 우병영은 경남도청으로 이용되었으며 그 외의 군사시설은 적절한 관리가 이루어지 않은 채로 남아 있다가 일제강점기에 들어와 철거되어 사라졌다. 이후에 내성 안에도 주민들의 살림집이 들어서고 주민 거주가 늘어나면서 진주성의 본래의 모습은 완전히 사라지게 되었다.

 

한국전쟁으로 폐허가 된 진주성은 1960년 족석루가 재건되었고 1963년 국가지정문화재 사적 118호로 지정되었으며 전체 면적은 173,036, 성곽길이는 1,760m이다. 1971년 정화사업을 통하여 본격적 복원작업이 시작되어 2002년 공북문 복원까지 이루어졌다.

 

참고자료

진주성·진주유등축제 세계유산 추진학술연구 진주성부분-, 2015, 진주시

진주성 이야기(진주문화를 찾아서17), 2014, 김준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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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향교

역사 2015. 5. 31. 21:14

진주향교(晉州鄕校)

 

향교는 유교의 옛 성현을 받들고, 지역 사회의 인재 양성과 미풍양속을 장려할 목적으로 설립된 지방의 교육기관이다. 향교의 역할은 교육과 제례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으며, 유생이 학문을 연마하는 명륜당과 일상 생활을 하는 기숙사 역할을 하던 동, 서재에서는 교육 기능을 담당하고, 공자와 저명한 유학자를 모시는 대성전 및 동·서무는 제례기능을 각각 담당하고 있다. 진주는 옥봉동 232-1(향교로 99-3)번지에 위치해 있으며 1972212일에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50호로 지정되었다.

 

진주향교(晋州鄕校)의 창건연대는 확실치 않으나 신라 소성왕 원년(799)에 지금의 진주(晋州)인 청주(菁州)의 노거현(老居縣)을 국학(國學)의 학생녹읍(學生祿邑)으로 했다고 한 것으로 보아 학교는 통일신라시대 때부터 운영된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 세종조 영의정 하연(河演)의 글로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수록된 사교당기문(四敎堂記文)에 의하면 고려 현종때 인물인 은열공 강민첨장군이 이곳에서 공부하였다고 한 것으로 보아 진주향교는 고려 초에 설립되었음을 알 수 있다.

 

각종 문헌자료를 종합하면, 고려 성종 6(987)에 향학당(鄕學堂)으로 창건되어 국학감(國學監)으로부터 경학(經學) 및 의학박사(醫學搏士)를 파견 수강토록 하였으며 현재의 의곡사 계곡에 위치하였다.

 

고려 현종 2(1011)에 중수 및 서재(書齋)를 중건하고 수학원(修學院), 학사(學舍), 서재(書齋), 사교학당(四敎學堂) 등으로 개칭되었으며, 조선 태조(朝鮮 太祖) 7(1398)에 문묘(文廟)를 창건하고 향교로서 면모를 갖추었으며, 훈도(訓導), 교관(敎官), 교수(敎授) 등이 성균관(成均館)으로부터 파견되었다.

 

조선 명종 13(1558)에 현 위치로 이건 하였으며 목사(牧使) 김홍이 대대적으로 중수하였다. 조선 선조 25(1592)에 임진왜란으로 인하여 소실(燒失)되었고 조선 선조 36(1603)에 병사(兵使) 이수일이 문묘(文廟)를 중건하여 1607(丁未年)에 병사(兵使) 김태허가 명륜당(明倫堂), (서재(西齋)를 중건하였다. 그 후 수차례 중수하였으며, 1962년에 강학공간(講學空間)인 명륜당(明倫堂), 동재(東齋), 서재(西齋)를 인접한 위치에서 현 위치로 이건하였고 제사공간(祭祀空間)의 출입문인 삼문(三門)은 현 위치의 대성전(大成殿) 앞마당으로 이건하고 풍화루(風化樓)를 삼문(三門)이 있었던 위치에 이건하였다. 명륜당(明倫堂)은 이건할 때에 정면 5칸에서 4칸으로 축소되었고 사교당(四敎堂)1986년에 중건되었다.

 

조선시대에는 국가에서 토지와 노비·책 등을 지급받아 학생들을 가르쳤으나, 갑오개혁(1894) 이후 교육기능은 없어지고 제사기능만 남아있다.

 

[건물구성]

 

대성전·명륜당·동무·서무·내삼문·동재·서재·사교당·풍화루 등 9동의 건물이 있다. 동서방향의 급경사지에 위치하고 있으며, 명륜당을 비롯한 교육공간이 앞에 있고 대성전을 중심으로 하는 제사공간이 뒤에 위치한 전학후묘(前學後廟)로 대성전을 중심으로 하여 건물들이 일직선 위에 대칭으로 배치되어 있다. 문묘는 대성전을 중심으로 양쪽에 동무·서무가 있고, 내삼문이 대성전 중심축에 배치되어 있다. 사교당은 명륜당이 중심에서 동쪽으로 치우쳐 있고 동재와 서재는 대성전을 중심으로 마주보고 있다.

 

대성전은 정면 3·옆면 2칸의 규모이며, 지붕 옆면이 여덟 팔()자 모양인 팔작지붕집으로 대성전으로는 보기 드문 지붕형태인데 팔작지붕 5량 구조로 전퇴(前退)를 두고 개방하였다. 동무·서무는 각각 정면 3, 측면 2칸의 맞배지붕 5량 구조로 되어 있으며, 정면 3칸이 쌍여닫이 띠살문이다. 내삼문은 정면 3, 측면 1칸의 맞배지붕 솟을삼문이다.

 

명륜당은 정면 4칸규모이며, 지붕 옆면이 사람 인()자 모양인 맞배지붕 5량 구조이며, 원래는 5칸이었던 것을 옮겨 지을 때 1칸을 줄인 것으로 보인다. 동재, 서재는 각각 정면 3, 측면 1.5칸의 맞배지붕 3량 구조이다. 풍화루는 정면 3, 측면 2칸의 팔작지붕 누각으로 누마루에 계자난간을 둘렀다. 사교당은 정면 4, 측면 1칸의 맞배지붕 3량 구조로 바닥은 마루를 깔았고 벽면 없이 전부 개방되었다.

 

중수 과정에서 많은 변형이 일어났는데, 특징적인 것은 교육 공간이 명륜당 이외에도 사교당을 배치함으로써 두 개의 명륜당이 중앙의 통로에 의해 좌우로 배치된 것 같은 느낌을 준다. 대성전의 영역이 너무 넓고 지대가 높아서 아래의 명륜당 영역이 왜소하게 보일 정도이며, 대성전의 내삼문 역시 너무 들어와 있어서 동·서무 사이를 가로 막고 있다.

 

연혁

987 고려성종6년에 창건 향학당으로 국학감에서 경학급의학박사를 파견수강

1011 고려현종2년에 중수급서재중건하고 수학 학사 서재를 사교학당으로 개칭

1398 조선태조에 문묘를 창건하고 향교로서 성균관으로부터 훈도교관 교수등 파견배치

1449 세종31년에 사교당 창건

1558 조선 명종13년에 비봉곡으로 이 건

1592 조선 선조25년에 임란으로 인하여 회진.

1603 선조36년에 구기인 현하대에 이건복원

1644 조선 인조22년에 현 위치 상대 중건(문묘).

1811 조선 순조11년에 중수 .

1907 조선순종1년에 중수

1910 경술국치부터 광복까지 항일독립운동기간중 일제탄압으로 전향의 명맥만 유지.

일제치하 6.25동란등으로 퇴락, 전적, 기물 일체일실.

1962년 명륜당, 풍화루 현위 치로 이건.

1971년 문묘급 원장 축대 대보수.

1972년 지방문화재 제50호로 지정.

1979년 동서재 중건.

1984년 명륜당 중수.

1985년 중수.

1986년 사교당 복원.

1992년 대성전 , 명륜당, 동서재를 보수급개수 개수.

1993년 명륜당 대보수. 영남향교사적, 대소인원개하마비문을 개수.

2004년 여성 유도회 결성. 충효교육원 유림회관 창건.

2005년 충효교육원 개원, 사단법인 범국민 예의실천 운동진주지부 결성, 대성전 서편 동량 대체등 대보수

2007년 청년유도회 결성.

2008년 시범향교지정.

 

자료이용자 참고사항

1.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관광공사의 설명은 고려 말 조선 초 경 현유(賢儒)의 위패를 봉안, 배향하고 지방민의 교육과 교화를 위하여 창건되었다.”라는 엉터리 설명으로 시작해서 토시하나 안틀림.

2. 향교의 역사, 역할 등에 대해서는 진주향교 홈페이지를 참조.

3. 진주시청의 자료가 가장 무난하며 자료에 인터넷 자료 중 오류도 있으니 확인바람.

4. 수행평가 학생들을 위해 떠도는 자료들을 재정리한 것임.

 

참고자료

진주역사(진주역사를 찾아서13), 김해영, 2010, 문화고을

진주향교, 디지털진주문화대전 http://jinju.grandculture.net

진주향교 홈페이지 http://www.jinjuhg.kr/

진주시청 http://tour.jinju.go.kr/01tour/SIGHT005.jsp?amode=_viw&cult_sno=468&cpage=1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100.daum.net/encyclopedia/view/14XXE0054928

한국관광공사 http://100.daum.net/encyclopedia/view/52XXX1955442

다음문화유산 http://heritage.daum.net/heritage/21595.daum#intro

위키백과

http://ko.wikipedia.org/wiki/%EC%A7%84%EC%A3%BC%ED%96%A5%EA%B5%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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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양호

역사 2015. 5. 30. 23:13

진양호

 

남강댐은 1920~30년대에 실시된 낙동강 개수계획의 일환으로 부산의 홍수피해를 줄이기 위해서 계획되었다. 하절기 집중호우로 발생하는 남강의 홍수량을 사천만으로 방류하기 위한 홍수조절 목적으로 1939년에 시공하였으나, 중단되었다가 1949년에 재착공하여 댐코어를 시공하는 도중 다시 중단되었다. 그 뒤 1962년에 제1차 경제개발5개년계획의 일환으로 홍수조절 외에 관개용수, 상수도용수 공급 및 발전을 포함하는 다목적 댐으로 건설되었다. 76개월의 공사기간을 거쳐 1969107일 준공되었다.

 

낙동강의 지류인 남강을 가로질러 완공한 낙동강 수계 최초의 다목적 댐으로 준공당시 길이 975m, 높이 21m의 중심코어형 필 댐(fill dam)이었다. 당시 진양호의 저수량은 13,600만 톤이었다. 1989년 댐 보강공사가 착공되어 19991220일 보강댐이 준공되어 진양호의 저수량은 39백만톤으로 늘어났으며 남강댐의 높이는 34m, 길이 1,126m, 현재 유역면적은 2,285이다. 기타 부대시설을 포함한 전체 보강 사업 준공도 200012월 완공되었다. 이로써 홍수조절과 생활 및 공업용수 공급은 물론 연간발전량은 4,000kw에서 4,130kw로 늘어났다.

 

남강댐 보강공사로 수몰된 지역은 진주, 사천, 산청에 걸쳐있으며 수몰된 가구는 1,641가구이며 수몰민은 6,698명이다. 진주시는 판문동, 귀곡동, 대평면, 명석면, 내동면, 수곡면 등 6개 동·면에 총 4814천 제곱미터가 수몰되었고 총 971가구, 3,530명이 이주 되었다.

 

주요 시설물로는 남강댐으로서 초당 1570의 계획 홍수량을 조절, 방류하기 위하여 문비 6문을 보유하는 여수로 시설과 홍수 때 사천만으로 방류를 위한 문비 10문을 보유하는 제수언 시설, 연장 11에 달하는 방수로 시설, 시설 용량 14kw의 발전소 시설이 있다. 남강댐 유역을 중심으로 52.623가 상수원보호구역으로 지정되어 있으며, 이 가운데 진양호상수원보호구역은 28.065에 이른다.

 

진주시 판문동과 내동면·대평면에 걸쳐 조성된 진양호는 경상남도 내 3개군 9개면에 걸쳐 있다. 주변에 약 2,000그루의 벚나무가 심어져 있어 봄 벚꽃 놀이가 펼쳐지고, 호수 주변 방풍림과 섬이 잘 어우러져 자연경관 또한 빼어나다.

 

수려한 자연 경관과 어우러진 진양호는 진주시민 및 서부 경남인들의 휴식공간으로 많은 사랑을 받고 있으며, 주변에는 우약정, 남인수 동상, 전통예술회관, 동물원, 진주랜드, 가족쉼터, 일년계단, 이재호 노래비 휴게전망대, 물 홍보관, 아시아 레이크사이드 호텔, 여관, 식당 등의 위락 시설을 갖추고 있다. 진양호 노을은 진주8경 중 하나이다.

 

자료 이용시 유의사항

1. 백과사전류는 1970년 완공, 관공서들은 1969년 완공으로 표시

2. 진양호 보강공사 이전 정보를 게재한 곳이 있으며 보강공사 이전, 이후 정보가 혼재된 곳도 있다.

3. 남강댐관리단의 정보를 기초로 했다.

4. 동네 학생들 수행평가용으로 돌아다니는 자료들을 재조합 정리했다.

 

참고자료

진주팔경(진주문화를 찾아서 8), 강희근, 2007, 지식산업사.

진주시청 홈페이지 진양호 http://tour.jinju.go.kr/01tour/SIGHT002.jsp

남강댐관리단 블로그 http://blog.naver.com/kwaternam

남강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100.daum.net/encyclopedia/view/14XXE0011756

진양호, 경남관광길잡이 http://www.gntour.com

진양호, 한국관광공사 http://100.daum.net/encyclopedia/view/52XXXX126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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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의 성폭력 위험도는 어느 정도일까?

 

한국탐사저널리즘센터 뉴스타파는 지난 519일 한국형사정책연구원이 올해 1월 발표한 <범죄유발 지역공간에 대한 위험성 평가도구 개발적용 및 정책대안에 관한 연구> 보고서를 토대로 시군구별 성폭력 위험 지도를 만들었습니다. 또한, 성폭력 위험도를 읍면동 단위에서 상세하게 검색할 수 있는 <읍면동 별 성폭력 위험도 DB>를 만들어 공개했다.(http://newstapa.org/25505)

 

한국형사정책연구원은 전국평균을 100으로 변환했을 때 각 지역의 성폭력 위험 정도를 표시했다. , 100보다 높은 지역은 전국 평균에 비해 성폭력 위험도가 높다는 뜻이다.

 

DB에 따르면 진주에서 성폭력 위험도가 가장 높은 동네는 성지동으로 성폭력위험도가 137.65이며 그 다음이 옥봉동(130.01), 강남동(112.81), 상대1(108.61), 상봉동동(107.36)이다. 전국평균보다 높은 지역은 이 상위 5곳뿐이며 모두 동지역이다. 상위 5곳을 제외한 진주시 전지역의 전체성폭력위험도는 100 이하이다.

진주시에서 전국평균보다 높에 나타난 성폭력 위험지역은 아래와 같다.

 

진주시의 성폭력 위험지역

순위

전체성폭력위험도

강간위험도

강제추행위험도

1

성지동(137.65)

성지동(181.13)

강남동(119.15)

2

옥봉동(130.01)

옥봉동(152.09)

옥봉동(113.72)

3

강남동(112.81)

상봉동동(125.22)

상대1(113.22)

4

상대1(108.61)

상평동(107.42)

성지동(107.92)

5

상봉동동(107.36)

정촌면(104.42)

명석면(100.26)

6

 

봉안동(103.98)

 

7

 

하대1(103.24)

 

8

 

일반성면(102.62)

 

9

 

가호동(100.66)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약간의 차이가 있다.

성지동은 강간위험도는 매우 높으나 강제추행 위험도는 4위로 상대적으로 낮다. 옥봉동은 강간위험도와 강제추행위험도에서 모두 두 번째로 위험하다. 면지역은 전체성폭력 위험도에서는 전국평균이하지만 강간위험도에서 정촌면과 일반성면은 전국평균이상이며 명석면은 강제추행위험도가 전국평균보다 높은 것으로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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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국제농식품박람회 예산을 살펴보면...

 

류재수 의원 등 진주시 의원 6 명은 국제농식품박람회의 수익금이 개인계좌를 거쳐 유력정치인에게 흘러갔다고 주장하며 비리의혹을 제기했으나 이에 대해 관계당국은 모르쇠로 일관하고 있다.

이에 오늘 저녁 730분부터 경남과기대 산학협력관에서 국제농식품박람회 비리의혹에 대해 진주시 의원 6(강갑중, 강민아, 류재수, 서은애, 서정인, 허정림)이 공익감사청구를 진행하고 오늘 설명회를 통해 서명을 받는다.

 

2011년부터 시작되어 현재 감사원의 감사와 공익감사청구가 진행되고 있는 국제농식품박람회의 예산에 대해 살펴보자

 

예산변동 추이(단위 : 백만원)

2011

2012

2013

2014

2015

941백만원

1997백만원

2672백만원

3758백만원

4258백만원

 

2011년도에는 진주첨단농업박람회라는 이름으로 처음 개최되었고 2012년부터 진주국제농식품박람회으로 명칭이 변경되어 개최되었다. 2013년부터 국제농업박람회와는 별도로 2억여원의 예산으로 토종농산물종자박람회도 개최하고 있다.

 

2011년은 전년도 전국체전 개최에 따른 진주시의 재정적자가 심화되어 극단적으로 예산을 축소했던 해이다. 그 결과 진주시립소년소녀합창단은 14천만원의 예산을 절감하기 위해서 해산되었다. 그렇게 아이들을 위한 예술단 운영을 포기할 만큼 절박한 진주시의 상황에도 불구하고 진주국제농식품박람회는 10억원에 가까운 신규예산이 투입되며 만들어졌으며 이렇게 급격하게 사업예산이 증가하는 사례는 극히 드물다.

 

이에 대해 진주시는 이 박람회의 성과가 높기 때문이라며 “52만 여명이 넘는 참관객이 방문했고 32개국 407개사, 710개 부스가 참가해 635억 원에 달하는 계약 실적을 달성했고 지역경제 파급효과는 300억 원대를 훨씬 웃돈다.”라고 설명했다.

 

그렇다면 진주시가 설명한 이 수치들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201410월 진주시축제예산

드라마페스티발

개천예술제

남강유등축제

17억원

108천만원

287천만원

 

3개의 축제가 함께 열린 이 기간동안 진주 방문객은 약 280여만명, 지역경제 파급효과는 1,600억 원을 넘었다. 이 세 축제에 투입된 국도비등을 제외한 순수 진주시예산은 35억 원이고 진주국제농업박람회에 투입된 순수 진주시예산은 27억 원이다. 10월 축제기간 중 남강 부교를 통과한 유료관광객만 50만명이 넘는데 이는 진주국제농식품박람회 총 참관객과 비슷한 숫자다.

 

축제와 박람회의 성격이 달라서 같이 비교하기 어렵다면 1015일부터 111일까지 개최되는 전라남도의 국제농업박람회와 비교해 보자. 전남의 박람회는 경제적 파급효과 5,026억 원, 참가업체들의 수출계약액이 아닌 조직위원회의 판촉 및 직접수입액 934억 원이다. 12개 전시·판매관에 20개국 350기관·단체·기업참가하는데 진주국제농식품박람회 참가국, 참가단체 및 기업 숫자의 7~80% 수준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그 경제적 파급효과와 수입액은 훨씬 높다.

 

진주시는 공익감사청구 등 진주시의원들의 의정활동이 국도비 확보에 어려움을 줄 수도 있다고 주장한다. 국도비는 그 예산이 진주시에 도움이 될 때에 의미가 있다. 2015년도 진주국제농업박람회 총예산 425천만원 중 진주시 자체예산은 275천만원이다. 15억원의 국도비를 확보하지 못하는 것은 안타깝지만 275천만원을 헛되이 쓰지 않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 돈이 더 많기 때문이 아니라 진주시민들이 자율적으로 결정해서 쓸 수 있는 돈이기 때문에 더욱 더 고심하고 낭비되는 부분이 없는지 살펴야 한다.

 

진주국제식품박람회 예산집행에 대해 진주시에서 법, 절차 운운하는 것에 대해 매우 유감이다. 시민들의 돈을 사용하며 이에 대해 문제가 제기되면 즉각적으로 대답할 수 있어야 한다. 개인신상정보 등 법으로 금지한 것이 아니라면 모든 자료는 공개되어야 한다. 차일피일 이핑계 저핑계 대며 미룰 일이 아니다.

 

감사원에서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발표하면 문제가 없어지는 것인가?

 

진주시장과 진주시 공무원들이 중앙정부와 윗사람이 아니라 시민들을 바라보며 일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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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시 인구증가, 일자리증가

시사 논단

 

이번 순서는 시사 논단입니다.

오늘은 진주참여연대 심인경 사무차장을 연결하겠습니다.

 

( 전화연결 )

> 심 차장님, 안녕하십니까, 오늘 어떤 내용입니까?

 

오늘은 진주시의 인구증가와 일자리 증가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 진주시에서 발표한 인구증가와 일자리 증가의 내용은 무엇입니까?

 

진주시는 지난 21일 진주소식 제17호에서 진주시의 인구가 26개월만에 5400여명 증가했으며 8000여개의 일자를 창출했다고 발표했습니다. 인구증가는 다양한 복지시책이 인구유입에 기여했으며 일자리창출은 혁신도시와 82개의 유망기업의 유치에 따른 것으로 진주시의 계획적이고 적극적인 행정지원 및 집중적인 투자유치활동의 성과라고 합니다. 또한 10년 이내에 50만인구시대가 도래할 것이라는 장밋빛 전망을 내놨습니다.

 

> 진주시 인구증가의 특이점은 무엇입니까?

 

진주시의 발표에 따르면 진주시의 인구는 2007333256명까지 줄었다가 이후 꾸준히 늘어났으며 2010년 이후 인구 증가폭이 더욱 늘어난 것으로 나옵니다. 그러나 통계청의 국가통계포탈에 나오는 지방지표를 보면 2011년 진주시의 인구증가율은 경남의 8개시 중에 6번째입니다. 인구가 줄어든 밀양시를 제외하고 인구가 증가한 경남의 7개 시 중에서 7위인 통영시와는 0.02%차이가 날뿐입니다. 통계청의 자료에 따르면 2008년부터 2011년까지 진주시의 인구증가율은 경남의 8개시들 중에 6-7위로 최하위 수준이며 합계출산율은 인구가 줄어드는 밀양시를 제외하면 꼴찌입니다. 이러한 자료로 볼 때, 진주시에서 주장하는 진주시의 특수한 복지시책이 인구증가에 기여했다는 주장은 무리가 있으며 진주시는 경남도내 다른 시에 비하여 왜 인구증가율이 낮은지에 대해서 고민해야 합니다.

 

> 진주시는 일자리가 늘어났고 이것이 인구증가에 증가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 평가하고 있습니다. 직접적인 연관이 있습니까?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2011년에 비해 2012년에 취업자의 수가 6500명 늘어났고 26개월간 인구는 5369명이 늘었습니다. 통계기간의 차이가 있습니다만 둘 사이에 일정한 관계가 있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일자리증가와 인구증가가 뚜렷하게 일치하는 것은 아닙니다. 진주시의 자체 통계를 보면 최근 5년간 일자리가 가장 많이 늘어난 해는 2009년으로 전년도 대비 7729명이 더 취업을 했습니다. 그러나 2009년에 주민등록상 늘어난 인구는 502명에 불과합니다. 일자리증가와 인구증가는 서로 영향을 주겠지만 진주시의 통계자료로 볼 때, 진주시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그 효과가 단기간에 그대로 드러나는 것은 아니라고 보여집니다.

 

> 진주 경제의 활성화를 위해서 진주시에 더 노력해야 할 부분은 무엇입니까?

 

발표한 자료의 인과관계에 문제점들은 있지만 진주시는 기업을 유치하기 위해서 노력했고 양질의 새로운 일자리를 만들기 위해서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기존에 진주시에 있는 기업들의 유지라는 측면에서는 매우 걱정스러운 상황을 만들어왔습니다. 지난 20114월 아트원제지 진주공장이 폐쇄될 때도 기업체의 말만 믿고 아무런 대책을 세우지 않았고 공장폐쇄를 막고자하는 노동자들이 시청을 찾아갔을 때도 기업유치를 위한 계획이나 예산은 편성되어 있으나 지역 공장 폐쇄 등에 대한 대책은 없다고 말을 했습니다. 그리고 지금 진주의료원이 폐업 위기에 놓여있지만 관여할 사항이 아니다” “경남도와 협의중이다는 답변만 있지 뚜렷한 대책은 없습니다. 진주시민들은 대동중공업의 이전으로 인하여 지역경제가 얼마나 피폐해졌는지 기억하고 있습니다. 진주시가 새로운 좋은 기업의 유치를 위해서 노력하는 것도 중요하겠으나 진주시에 현재 있는 기업들과 일자리들에도 더 많은 관심을 보여주길 부탁드립니다.

> 심 차장님, 오늘 말씀 감사합니다.

지금까지 진주참여연대 심인경 차장의 논단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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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의료원 폐업

 

시사 논단

 

이번 순서는 시사 논단입니다.

오늘은 진주참여연대 심인경 사무차장을 연결하겠습니다.

 

( 전화연결 )

> 심 차장님, 안녕하십니까, 오늘 어떤 내용입니까?

 

오늘은 경남도가 제시하고 있는 진주의료원의 폐업 이유에 대해서 짚어보는 시간을 가져보겠습니다.

 

> 경남도가 진주의료원을 폐업하기로 결정한 배경은 무엇입니까?

 

경남도는 진주의료원 폐업 배경으로 의료원의 첫째, 누적부채가 급증했고, 둘째, 의료수익 대비 인건비 비율이 높고, 셋째 진주지역 의료서비스 과잉으로 병상가동률이 저하돼 무수익 악순환이 계속되고 있으며, 넷째 의료원 직원들이 경영정상화를 뒷전으로 미뤄서 병원을 정상적으로 운영하기 힘들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주장들은 근거가 매우 취약한 것으로 문제가 많습니다.

 

> 경남도가 주장하는 페업 근거의 문제점은 무엇입니까?

 

첫째 부채를 말씀드리면 경남도는 진주의료원의 부채가 많아서 곧 파산할 것처럼 말하고 있습니다. 진주의료원의 부채는 279억원이고 부채비율은 66%입니다. 참고로 현대자동차의 부채는 75조원에 부채비율이 154%입니다.

둘째 경남도는 수익 대비 인건비 비율이 82.9%로 높고 초전동으로 이전후 150% 이상 인력이 증가해서 문제라고 합니다. 그러나 제주의료원은 인건비 비율이 101%이고 80%넘는 의료원들도 많습니다. 더구나 진주의료원 지난 6년간 임금동결을 해왔습니다. 인력이 많다는 것도 터무니 없는 이야기입니다. 의료원은 325병상에 의사 18, 직원이 320명입니다. 병상 숫자에서 292병상으로 비슷한 규모인 제일병원은 의사 34명에 직원이 400명입니다. 의사 정원을 늘려서 의료서비스 질을 높이고자 했으나 이를 못하게 막은 것은 경남도가 중심이 된 의료원 이사회입니다.

셋째 의료서비스 과잉문제인데요, 진주의료원은 신축이전 이후 어려운 상황에서도 병상가동율이 80%가 넘었습니다. 지난 8일 보건복지부의 발표에 따르면 경상대병원 응급센터는 환자가 많아서 병상이 부족하고 진주의료원 응급센터는 전국 상위 40%에 들어가는 우수한 기관입니다. 창원과 비교를 해서 과잉이라고 하는데 창원은 의료시설이 부족한 곳입니다.

 

> 경남도에서는 진주의료원의 공공성이 미흡하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사실인가요?

 

만약에 공공성이 미흡했다면 이는 관리감독기관인 경남도에 1차적인 책임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부분도 경남도의 주장과 다릅니다. 경남도는 227일 기준으로 진주의료원 입원환자 189명 중, 기초생활 수급자와 차상위계층이 17%에 불과하다고 말하고 있으나 진주시 전체 인구에서 이들이 차지 하는 비율은 3.6%에 불과합니다. 인구비율로 따졌을 때, 5배나 더 많습니다. 경남도는 진주의료원의 공공의료예산이 낮다고 주장하고 있으나 공공의료예산에 포함하고 있지 않는 포괄수과제 시범사업, 호스피스완화 의료센터 운영 등 다른 병원들에서 시행하지 않는 공공정책사업을 정부와 경남도의 지원없이 꾸준히 시행하고 있습니다.

경남도는 민간의료기관들이 공공의료를 시행할 수 있다고 하는데 경남도에서 민간병원들 중에 공공의료 수행기관으로 지정한 병원이 한군데도 없습니다.

 

> 그 동안 경남도가 진주의료원을 지원한 규모는 어느 정도인가요?

 

신축이전 비용 534억 중 113억을 부담했고 2010년에 1193백만원, 2011년에 136천만원, 2012년에 1242백만원을 지원했습니다. 경남도는 134백억이 넘는 부채를 갚기 위해서 진주의료원에 지출하는 10억원을 아끼겠답니다. 1년예산이 62천억원이 넘는 경남도가 10억여원의 예산을 아끼기 위해서 진주시민이 연간 15만여명이 이용하는 의료시설을 폐쇄하겠다고 합니다. 진주의료원은 현재 그 땅값만해도 경남도가 의료원신축을 위해 투자한 돈의 두 배가 넘습니다. 경남도는 진주시민의 생명과 재산을 강탈하려는 행동을 즉시 중단해야 합니다.

> 심 차장님, 오늘 말씀 감사합니다.

지금까지 진주참여연대 심인경 차장의 논단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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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시 아파트형공장

 

시사 논단

 

이번 순서는 시사 논단입니다.

오늘은 진주참여연대 심인경 사무차장을 연결하겠습니다.

 

( 전화연결 )

> 심 차장님, 안녕하십니까, 오늘 어떤 내용입니까?

 

오늘은 2012년에 진주시의회에서 네 번이나 부결된 아파트형공장에 대해서 이야기 나누는 시간을 가져보겠습니다.

 

> 아파트형공장에 대해서 좀 더 자세히 알려주시죠.

 

3층 이상, 6개 이상의 공장이 집적된 건물을 아파트형 공장이라 하며 법정용어는 지식산업센터입니다.

아파트형 공장은 1979년 수도권 과밀 억제 권역 내에서 새로운 공장 건설이 어렵게 됨에 따라 1989년부터 도시형 중소기업의 입지수요가 높은 대도시 주변지역을 중심으로 건설되어 공급되고 있습니다.

초기에는 중소기업진흥공단이나 도시개발공사등 공공기관에 의해 공급되었으나 2000년대 이후 민간 건설이 대세를 이루었습니다.

20113월 현재 전국에 362개소(설립기준)가 건립되었는데 20089월 기준, 150개소에 건립이 된 것에 비교해 볼 때, 최근에 비약적인 증가세를 보이고 있고 수도권에 전체 83%가 집중되어 있습니다.

건설 목적은 크게 다섯 가지입니다. 첫번째는 공장부지를 확보하기 힘든 도시지역에서 중소기업을 위한 토지이용의 고도화, 두 번째는 주거지 주변에 남아 있는 중소규모 공장을 통합하여 도시환경 개선, 세 번째는 도시내의 소규모 무등록공장을 해소, 네 번째는 저소득층 소득창출, 다섯 번째는 중소기업의 경쟁력 제고입니다.

진주시는 현 이창희 진주시장의 공약사업으로 처음 제기되어 공론화되었는데 아파형공장은 시설 투자 절감, 집적 이익, 정보 교류, 작업 환경 개선 등의 효과를 가져올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입주업체 간 유기적 협력 시스템과 관리 체계가 미흡할 경우에는 오히려 도심공동화의 역기능이 있을 수 있습니다. 진주시는 망경동 구역사를 후보지로 지정했는데, 철도로 인하여 도심내 개발정체구역이었던 망경동 지역이 아파트형공장 사업이 실패할 경우, 더욱 심각한 상황에 처할 수도 있기 때문에 진주시에서 진행하고 있는 아파트형 공장사업에 대해서 우려하고 있습니다.

 

> 망경지역발전위원회에서 진주시의회의 아파형공장부지매입 부결에 항의하며 진주시의회에서 시위를 했던데 무엇이 문제인가요?

 

결론부터 말하면 타당성과 경비문제입니다. 작년에 저희 단체가 민선5기 중간평가를 위해서 조사한 바에 따르면 아파트형 공장 사업은 이창희 시장의 공약에서는 경비조달 문제가 구체적으로 다뤄지지 않았고 수도권을 중심으로 아파트형 공장이 급격히 확대되던 때였습니다. 당선 이후, 중소기업청의 공모사업이 있어서 진주시에서는 이에 지원을 했으나 7개 신청지역 중, 5개 광역시만 1차 대상지로 선정되었고 진주시와 같은 중소도시는 2차 사업대상지가 되었으나 광주, 대구등 1차 대상지가 사업포기를 고려하며 그 효율성에 의문이 제기되어서 2차사업은 계획이 중지된 것으로 보입니다. 이에 진주시는 1차 대상지 중에 포기하는 곳이 발생하면 다시 신청하여 국비를 확보한다는 계획을 세웠습니다.

진주시는 공모에 필요한 사업대상지역 토지매입을 위해서 그 경비를 의회에 요구했고 진주시 의회는 사업의 타당성과 경비 확보를 문제 삼았습니다.

강민아 진주시의회 기획경제위원장은 진주시에서 상평공단 대체지로 아파트형 공장은 정촌, 사봉 등 진주시 주변에 상평공단 대체 산업단지가 있어서 타당하지 않으며 어떤 아파트형 공장을 만들 것인지 명확하지 않아서 실패할 우려가 있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경비조달에 문제에 있어서 진주시에서 국비조달을 하겠다고 했으나 주무관청인 중소기업청은 아파트형 공장과 관련한 새로운 공모사업이 없으며 포기할 것이라고 알려진 대구는 지난해에 착공을 했기에 진주시의 주장이 타당하지 않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아파트형 공장에 대해서는 양쪽의 주장이 다르지만 진주시 의회도 구역사와 폐선부지에 대한 진주시의 매입에 찬성을 한다니 망경동 주민들께서 걱정을 조금 덜 하셔도 될 것 같습니다.

 

> ‘아파트형 공장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할까요?

진주시는 아파트형공장의 추진이유로 상평공단을 포함한 지역의 영세한 중소제조업체의 사업공간이 절실하다는 것을 들고 있습니다. 그러나 용역보고서는 지하1층 식품제조업, 지상2층 섬유품 제조업, 지상3층에 의료품제조업, 지상4층에서 7층까지 전문서비스업체, 8층은 사회적기업과 산학연계시설을 배치할 것을 제안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용역보고서의 수요조사업체 중에는 회계사무소, 사진관, 미용실, 빵집 등이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진주시의 현재 주장과 용역보고서, 용역보고서 내의 수요조사 업체들 사이에 일관성을 전혀 찾아볼 수 없습니다. 용역보고서에 따르면 이 업체들 중 70.5%가 아파트형공장에 입주자격이 있어도 입주하지 않겠다고 합니다. 2014년에서 완공예정인 2015년 사이에 예상되는 신규 수요 업체는 2곳에 불과합니다.

용영보고서는 그 내용에도 문제가 많습니다. 입주대상업체인 진주지역 4개 창업보육센터 입주기업 58개와 창업보육센터 졸업기업 177개에 대해 입주여부를 물은 내용이 없습니다. 보고서 204쪽에 설문조사를 한 200개업체 중 당장입주는 2%, 입주고려가 20%, 추이를 지켜보겠다는 기업이 7.5%로 나오는데 동일한 보고서 243쪽에서는 진주,사천지역 아파트형 공장 입주 대상업체는 3,722개이며 설문조사결과 전체의 37%가 입주의사를 갖고 있다고 나옵니다. 두 설문결과가 같은 것인지 다른 것인지 왜 차이가 나는지 설명도 없습니다. 아파트형공장 운영에 따른 부가가치는 말하고 있으나 진주시에서 운영할 경우 발생할 경상경비에 대한 내용이 없습니다.

진주시는 문제해결을 위해서 시민들이 납득할 수 있는 제대로된 계획서를 제출해야 합니다. 그리고 전문가와 관계자들과 협의를 거쳐 시민공청회 등을 통해서 의견을 모아야 합니다. 근거가 부실한 장밋빛 환상만 선전해서 주민들을 거리로 내모는 행동을 중지해야 합니다. 아파트형 공장의 예정부지인 구진주역사와 폐선부지의 활용은 망경동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진주도심을 재구성하는 매우 중요한 사업입니다.

이창희 진주시장의 공약 이행도 중요하겠으나 진주시의 미래를 위해 정치적인 입장을 떠나 힘과 지혜를 모아야 할 것입니다.

> 심 차장님, 오늘 말씀 감사합니다.

지금까지 진주참여연대 심인경 차장의 논단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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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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