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연표

역사 2015. 5. 1. 21:26

진 주 연 표

연대

주요내용

알아둘 것

참고

백악기

공룡화석

내동면 유수리 가화천

천연기념물 390

백악기

공룡화석

진성면 가진리, ·공룡발자국

천연기념물 395

백악기

공룡화석

호탄동, ·공룡발자국

천연기념물 534

기원전

500년경

청동기유적

대평면, 초전 등

 

가야시대

옥봉고분군

수정봉, 옥봉의 이름 근원

 

685

(신문왕5)

청주

1925년 경남도청의 부산이전 이전까지 1400여년간 경남지역 수부도시

강주(747)

진주(995)

799

국학

노거현을 학생 식읍으로 지급

 

8세기

욱면랑 성불

6두품 귀진, 여종의 9년불공

 

987

향교

향학당으로 창건

현 의곡사 계곡

1241

촉석루

창건, 김지대

 

1379

진주성

석성으로 수축, 배극렴, 하륜

 

 

명석자웅석

백성의 부담을 덜고자 성돌이 되려한 돌

이설 : 몽고침략기

1498

금란계

경임, 이손, 김일손 등 29명 참가

제세치국평천하

1592~7

임진왜란

김시민, 논개

문록경장의역

1721

의기

논개 공인. 의암사적비, 최진한

 

1722

괘불탱

청곡사영산회

국보 302

1740

의기사

창건, 남덕하

 

1862

진주농민항쟁

유계춘, 삼정문란

 

1868

의암별제

정현석

현 논개제

1894

갑오농민전쟁

고승당산 전투, 내대

 

1895

경상우도소학교

근대 공립학교

현 진주초등학교

1909

경남일보

최초의 지방일간지, 장지연

 

1919

삼일운동

318, 김재환, 권채근, 강달영 등

 

1920

진주소년회

강영호, 고경인, 강민호

 

1923

형평운동

424, 강상호

 

1924

4257

축구팀

 

1925

도청이전

부산으로 이전.

 

1949

개천예술제

지방예술제의 효시

영남예술제

1970

남강댐

1939년 착공, 최초의 댐

 

1995

진주시

도농통합, 진양군 폐지

 

  시험삼아 만들어 봤습니다. 내용을 더 보충해야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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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국제농식품박람회 예산을 살펴보면...

 

류재수 의원 등 진주시 의원 6 명은 국제농식품박람회의 수익금이 개인계좌를 거쳐 유력정치인에게 흘러갔다고 주장하며 비리의혹을 제기했으나 이에 대해 관계당국은 모르쇠로 일관하고 있다.

이에 오늘 저녁 730분부터 경남과기대 산학협력관에서 국제농식품박람회 비리의혹에 대해 진주시 의원 6(강갑중, 강민아, 류재수, 서은애, 서정인, 허정림)이 공익감사청구를 진행하고 오늘 설명회를 통해 서명을 받는다.

 

2011년부터 시작되어 현재 감사원의 감사와 공익감사청구가 진행되고 있는 국제농식품박람회의 예산에 대해 살펴보자

 

예산변동 추이(단위 : 백만원)

2011

2012

2013

2014

2015

941백만원

1997백만원

2672백만원

3758백만원

4258백만원

 

2011년도에는 진주첨단농업박람회라는 이름으로 처음 개최되었고 2012년부터 진주국제농식품박람회으로 명칭이 변경되어 개최되었다. 2013년부터 국제농업박람회와는 별도로 2억여원의 예산으로 토종농산물종자박람회도 개최하고 있다.

 

2011년은 전년도 전국체전 개최에 따른 진주시의 재정적자가 심화되어 극단적으로 예산을 축소했던 해이다. 그 결과 진주시립소년소녀합창단은 14천만원의 예산을 절감하기 위해서 해산되었다. 그렇게 아이들을 위한 예술단 운영을 포기할 만큼 절박한 진주시의 상황에도 불구하고 진주국제농식품박람회는 10억원에 가까운 신규예산이 투입되며 만들어졌으며 이렇게 급격하게 사업예산이 증가하는 사례는 극히 드물다.

 

이에 대해 진주시는 이 박람회의 성과가 높기 때문이라며 “52만 여명이 넘는 참관객이 방문했고 32개국 407개사, 710개 부스가 참가해 635억 원에 달하는 계약 실적을 달성했고 지역경제 파급효과는 300억 원대를 훨씬 웃돈다.”라고 설명했다.

 

그렇다면 진주시가 설명한 이 수치들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201410월 진주시축제예산

드라마페스티발

개천예술제

남강유등축제

17억원

108천만원

287천만원

 

3개의 축제가 함께 열린 이 기간동안 진주 방문객은 약 280여만명, 지역경제 파급효과는 1,600억 원을 넘었다. 이 세 축제에 투입된 국도비등을 제외한 순수 진주시예산은 35억 원이고 진주국제농업박람회에 투입된 순수 진주시예산은 27억 원이다. 10월 축제기간 중 남강 부교를 통과한 유료관광객만 50만명이 넘는데 이는 진주국제농식품박람회 총 참관객과 비슷한 숫자다.

 

축제와 박람회의 성격이 달라서 같이 비교하기 어렵다면 1015일부터 111일까지 개최되는 전라남도의 국제농업박람회와 비교해 보자. 전남의 박람회는 경제적 파급효과 5,026억 원, 참가업체들의 수출계약액이 아닌 조직위원회의 판촉 및 직접수입액 934억 원이다. 12개 전시·판매관에 20개국 350기관·단체·기업참가하는데 진주국제농식품박람회 참가국, 참가단체 및 기업 숫자의 7~80% 수준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그 경제적 파급효과와 수입액은 훨씬 높다.

 

진주시는 공익감사청구 등 진주시의원들의 의정활동이 국도비 확보에 어려움을 줄 수도 있다고 주장한다. 국도비는 그 예산이 진주시에 도움이 될 때에 의미가 있다. 2015년도 진주국제농업박람회 총예산 425천만원 중 진주시 자체예산은 275천만원이다. 15억원의 국도비를 확보하지 못하는 것은 안타깝지만 275천만원을 헛되이 쓰지 않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 돈이 더 많기 때문이 아니라 진주시민들이 자율적으로 결정해서 쓸 수 있는 돈이기 때문에 더욱 더 고심하고 낭비되는 부분이 없는지 살펴야 한다.

 

진주국제식품박람회 예산집행에 대해 진주시에서 법, 절차 운운하는 것에 대해 매우 유감이다. 시민들의 돈을 사용하며 이에 대해 문제가 제기되면 즉각적으로 대답할 수 있어야 한다. 개인신상정보 등 법으로 금지한 것이 아니라면 모든 자료는 공개되어야 한다. 차일피일 이핑계 저핑계 대며 미룰 일이 아니다.

 

감사원에서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발표하면 문제가 없어지는 것인가?

 

진주시장과 진주시 공무원들이 중앙정부와 윗사람이 아니라 시민들을 바라보며 일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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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능력시험 준비 강의노트

1. 들어가며
역사는 개인들이 했던 행동들 중에 중요한 것을 모아 놓은 것입니다. 역사를 안다는 것, 즉 역사공부를 한다는 것과 어떤 사람을 알아간다는 것은 그런 의미에서 연장선에 있으며 동일한 과정이라고 보면 됩니다.

...

열길 물 속은 알아도 한길 사람 속은 모른다는 속담처럼 사람을 안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며 그 사람들의 행동의 결집체인 역사를 안다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닙니다.

어떤 사람을 알기 위하여 그 사람이 태어나서부터 지금까지 뭘 했는지 다 알 필요는 없습니다. 물론 그 사람에 대해서 자세히 알수록 사귀는 것이 쉬워질 것이라 추정할 수 있고 가까이 지내다보면 더 잘 알게 되기도 합니다만 살아가면서 만나는 모든 사람을 시시콜콜 잘 알아야 할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알려고 하는 범위는 몇몇 특수한 직업에 종사하거나 성격이 특이한 사람들을 제외하면 대개 자신의 필요에 따라 정해집니다. 옆 집 사는 처녀(또는 총각)에 대해서 알아야 할 것과 옆 집에 사는 애인에 대해서 알 수 있는 것과 옆 집 사는 배우자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것이 각기 다른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나와의 관계에 따라 옆 집 사는 사람에 대해 알고 있는 정보에 대한 평가도 매우 달라집니다. 옆 집 사는 배우자의 쓰리사이즈를 아는 것은 별일 아니고 옆 집 사는 애인의 쓰리사이즈를 아는 두 사람의 관계가 어느 정도 진척되었는지 알 수 있는 판단의 근거가 될 것이고 모르는 옆집 처녀(또는 총각)의 쓰리싸이즈를 아는 것은 매우 놀랍고 대단한 일이지요. 특수하게 이쪽 부분으로 능력이 탁월한 사람들은 예외입니다.

이걸 역사에 대입해서 말하면 단군을 아는 것과 천조대신(일본의 시조신, 태양신)을 아는 것의 차이를 말합니다. 우리 나라 사람 중에 단군을 들어본 적이 없다하면 참으로 난감한 일이지만 천조대신을 모른다고 해서 난감하게 생각할 사람은 없습니다.(아직도 식민지시대라서 이걸 꼭 알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몇몇 특이한 사람들이 있긴 합니다.)

모든 사람을 내 마누라 알 듯 알아야 할 필요는 없습니다.(고백하면 전 결혼해 본 적이 없어서 내 마누라 알 듯 한다는 것이 어느 정도 아는 것인지 모릅니다) 같은 의미로 역사를 알기 위해서 아주 많은 사실들을 시시콜콜 알아야 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역사 공부를 하거나 시키는 사람들은 학생들에게 그렇게 시시콜콜한 것까지 자세히 알아야 하는 것처럼 이야기를 해서 학생들을 매우 피곤하게 합니다.

그러나 현실은 아래의 두 가지 상황입니다.

첫째, 공부는 배우자처럼 시시콜콜한 것까지 알 것을 요구하지만 그것이 이혼당하기 딱 좋은 정도라는 것입니다. 배우자의 머릿속에 들어 있는 것을 잘 알도록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그 외양적인 것에 대해서만 잘 알도록 요구합니다.
둘째, 시험은 옆 집 사는 이성과 옆 집 사는 애인의 중간 정도 수준만 알면 웬만큼 점수(7~80점)를 딸 수 있습니다.

우리가 준비하는 시험을 위해서 할 일은 두 번째에 해당하는 것으로 아주 쉬운 작업입니다. 시험에서 1급부터 6급까지 나눈 것은 어린이가 이성에 대해서 아는 수준(5,6급), 청소년이 이성에 대해서 아는 수준(3,4급), 어른이 이성에 대해서 아는 수준(1,2급)을 점검하기 위한 것으로 보면 됩니다.

역사 시험은 그 사회의 수준을 바로 알 수 있습니다.
안타깝게도 우리 사회는 타인의 내면의 아름다움을 알고 존중하도록 요구하지 않습니다. 적당한 거리에서 그 외양만 알고 데이터화된 스펙만을 요구하고 있으며 딱 그 정도 수준의 역사문제를 냅니다. 미안하지만 전 이런 천박한 인식수준에 잘 편승하는 법에 대해서 알려드릴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프랑스 대학입학 자격 시험에 통과할 수준의 공부를 원하신다면 할 수 있습니다만 시작하기 전에 이런 질문을 드릴 수 밖에 없습니다.
“시간과 돈이 많으십니까?”

고등학교 졸업할 정도면 아래와 같은 질문에 답해야 하는데, 저 정도 공부하는데 시간과 돈이 많이 들어간다. 왜냐면 니들 머리구조를 바꿔야 하기 때문이다. 우린 이런 거 공부하자는게 아니다.

“인간은 어떻게 자신이 역사 속에 존재함을 인식할 수 있는가?”
“역사법칙이 실존하는지 상상의 결과물인지 논증하라”
“삼국시대 이래 한국인의 역사인식 변화과정에 대해 논하라”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라는 국호에 투영된 남북한의 역사인식에 대해 논하라”

2. 미션1 : 니 옆집에 애인을 만들기 위해서 먼저 해야 할 것은?
---- 이건 와서 들어라 ----

3. 미션2 이하 학생들 학업 진척도를 보고 결정하겠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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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도 진주시 결산

시사 논단

 

오늘 제172회 진주시의회 정례회가 19일간의 회기를 시작합니다.

이번 회기의 주요안건은 2013년도 진주시 결산입니다. 지난 6월에 개최되어야 했으나 지방의회 선거로 늦춰진 것입니다.

오늘은 진주참여연대 심인경 사무차장을 연결해

2013년 진주시 세입세출 결산에 대해 이야기 나누겠습니다.

 

( 전화연결 )

> 심 차장님, 안녕하십니까? (인사)

지금 진주시 의회에서 2013 회계연도에 대한 결산을 하고 있습니다. 그 내용에 대해서 설명을 좀 해 주시죠.

 

2013년도 예산현액은 12388억원이고 수납액은 1211억원이며 지출액은 8,980억원입니다. 2014년도로 이월되는 차인잔액은 331억원입니다. 차인잔액 중 명시이월, 사고이월, 계속비이월, 국도비보조금 집행잔액을 제외한 순세계잉여금은 1,560억원입니다.

 

> 작년에 2012년도 결산 때도 안쓰고 남은 돈이 많은 것에 대해서 지적해 주셨는데 2013년도는 더 늘었군요 왜 이런가요?

 

2012년도 차인잔액은 2,492억원인데 2013년 차인잔액은 331억원으로 539억원이 늘었습니다. 불용액, 즉 쓰지 않은 돈은 1119억원으로 전년도에 비해 370억원이 늘어났습니다. 이에 대해 진주시결산검사위원회는 세출절감 노력, 사업 타당성검토, 재정건전성 확보를 위한 노력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지출액과 이월액을 포함한 전체 결산으로 확대해서 살펴보면 진주시의 재정운영에 대해서 매우 우려를 할 수 밖에 없습니다. 진주시는 총지출액이 예산현액의 75.3%에 불과합니다. 이 중에 국토 및 지역개발은 예산 131억원 중에 509억원만 지출했고 이월액이 502억원이며 불용액은 20억원이 조금 안되어 전체 지출비율은 49%에 불과합니다. 산업중소기업부분은 예산이 557억원인데 지출은 297억원이고 이월액이 2479천여만원, 불용액은 12억원 정도로 전체 지출비율은 53%입니다. 진주시 예산 전체 지출비율은 75.3%에 불과하고 이는 전년도의 80.9%에 비해서 예산집행실적이 더 줄어든 것입니다. 이에 대해 진주시 결산검사위원회는 집행실적 미흡과 다음연도 이월액이 예산액의 12.3%에 달하는 것에 대해 우려를 표시했으며 예산집행과 업무추진 진도를 연계하여 분기별 주요사업 심사분석을 실시할 것을 제안했습니다.

 

> 진주시의 예산집행실적은 떨어졌지만 불용액이 늘어나 예산을 아껴 쓴 것은 맞지 않나요(좋게 평가해야 하지 않나요)?

 

불용액의 증가를 좋다나쁘다 말하기 힘듭니다. 좋게 평가를 한다면 불용액이 줄면 그 만큼 예산편성을 잘했다고 볼 수도 있고 불용액이 늘어났으면 그 만큼 예산절감을 위해 노력했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나쁘게 평가하면 반대로 해석할 수도 있기 때문에 불용액은 액수의 단순증감이 아니라 그 내용을 구체적으로 살펴봐야 합니다. 진주시의 2013년도 총 불용액은 1119억원인데 이 중 예비비 및 기타 항목의 불용액이 847억원입니다. 예비비의 예산은 2012년도 346억원에서 2013년도 826억으로 480억원이 증가했습니다. 일반회계에서 전년도에 비해 불용액이 증가한 부분은 문화관광 9억원, 교육 4천만원, 사회복지에서 26억원 늘어난 것이 전부입니다. 전년도에 비해 증가한 불용액이 370억원인데 예비비 항목에서 증가한 480억원을 빼면 불용액은 전년도에 비해서 줄었습니다. 예비비 사용액은 전년도와 크게 차이나지 않기 때문에 불용액의 단순 증가를 근거로 진주시가 예산절감 노력을 했다는 진주시 결산검사위원회의 평가는 맞지 않습니다.

 

> 결산서를 통해서 본 진주시의 재정운영에 대해서 전체적인 평가를 해 주시지요.

 

진주시는 올해 예산을 편성할 때는 800억원이 넘는 예비비를 줄여야 하며 올해 530억여원이 늘어 1214억원에 달하는 채무를 줄이기 위해서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특히 75%에 불과한 예산집행율을 더 높여야 합니다. 전체 예산의 1/4을 지출하지 않았다는 것은 이유가 어디에 있든 분명한 문제입니다. 진주시는 작년에 진주시 예산이 1조원시대에 진입했다고 홍보를 했습니다만 결산서를 보면 그 상당수가 이월에 의해서 발생한 예산증가입니다. 이는 일을 안했거나 예산을 잘못 편성해서 돈이 남았는데 그것을 근거로 예산증가했다는 홍보한다는 비판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남은 돈의 쓸 곳을 정하지 못해 예비비로 책정하고 그 예비비가 많이 남아 불용액이 된 것을 근거로 다시 예산을 절감했다는 말을 하는 모양이 되어버렸습니다. 이러한 오해를 줄이기 위해서 진주시는 근거가 미약한 예산관련 홍보보다는 좀 더 정확한 예산편성과 집행에 더 신경을 써야 할 것입니다.

 

> 심 차장님, 오늘 말씀 감사합니다.

지금까지 진주참여연대 심인경 차장의 논단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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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년 대학원 1학년 때 논문쓰기위해서 정리한 글이다.

나는 브루스 커밍스를 E.H.카 만큼 위대한 역사학자라 생각했기에 그가 쓴 한국전쟁의 기원 이후를 연구하고자 했다.

이 주제를 포기했던 이유는 2가지이다.

첫번째는 나의 생각과 거의 유사한 글을 박명림 교수가 "대쌍관계동학"을 한국현대사에 접목시켜 그의 박사논문으로 썼고 출판까지 했으며 상까지 받았다. 이 글에 박명림의 논문이 없는 이유는 그는 역사학 전공자가 아니라 정치학 전공자이기 때문에 그 논문을 알지 못했다. 역사전공자들 논문을 정리하고 정치학과 사회학 논문, 책들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그의 책을 알게 됐다. 짜증스러워 그의 책도 안읽었고 이 주제도 덥었다.

이 주제를 덥었던 결정적인 이유는 박명림의 글의 아니라 내가 공부한 학교의 교수님들께서 현대사를 역사학의 한 부분으로 인정하는 것에 많은 의문점을 갖고 계셨기 때문이다. 교수님들은 역사학 밖의 학문(사회학이나 정치학, 경제학) 논문들을 인용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으셨다. 연구사 정리의 성격이 강한 이 논문에 박명림의 글이 인용되지 않은 이유이며 내가 박명림의 글을 늦게 알게된 이유이기도 한다. 어째든 학위 따려면 이 주제는 포기해야 했다.

하지만 십수년이 지난 지금도 마음에 남아 있다. 논문주제를 찾기 위해서 3달을 도서관에 살았다. 현대사와 관련된 도서관 책들을 처음부터 다시 다 읽었다. 주제를 정한 후에 지금보면 많이 부족하고 몇 자 안되는 이 글을 쓰기위해서 일주일 동안 밤을 새웠다. 과방에서 글을 썼는데 그 덕에 학부다니는 후배들은 과방에서 떠들지도 못했고 단 2대뿐인 과방 컴퓨터를 일주일 동안 쓰지도 못했다.

볼품없는 이 글을 내가 사랑하는 이유는 이 들에 담겨 있는 내용이 아니라 여기에 담겨있는 나의 열정이다. 그것을 함께 나누지 못해서 아쉽지만 나의 소중한 추억이다.

다시 보면서 글을 다듬었다. 내용 중 일부는 제대로 생각이 안나서 문장만 다듬었다.

다시 보니 글의 주제가 아니라 내 글쓰기 능력의 문제였던 것도 같다. 당체 뭔 말인지 알아먹기 힘들다....ㅋㅋ

 

 

한반도에서 1972년 체제

- 남한의 유신체제와 북한의 사회주의 신헌법체제를 중심으로.

 

1.연구목적

1972년에 남북한에 권위주의 체제가 확립되었다. 그러나 이에 대한 구체적인 연구논문을 찾아보기는 힘들다. 대다수 현대사 서술에서는 1945년 이후 남북한을 독립된 연구단위로 서술하고 한국전쟁 이후의 역사서술은 완전히 별개로 취급되고 있다(통일문제만이 예외이다.) 이것은 남북의 양체제가 너무나 극단적으로 다르며 남한연구자 및 외국연구자들의 북한에 대한 깊이 있는 정보접근 자체가 거의 불가능하다는 객관적인 조건에 따른 결과이다.

연구를 어렵게 하는 이러한 객관적인 조건은 1972년 남북한 헌법에 대한 내용분석에 앞서 그 헌법들을 통해 발현된 남북의 체제가 일시적인 유사성인지 해방 이후 한반도 역사의 지속적인 과정들 중의 하나인지에 대한 판단이 선행되어야 했다. 

1972년에 성립된 양체제에 대한 검토과정에서 일부 유사성을 찾기도 했으나(주1) 구체적인 진행과정은 매우 달랐다. 본 연구의 목적은 남북한사의 유사성이나 차이성을 밝히는 것이 아니다. 통일을 위해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남북역사를 하나의 역사로 인식하는 것이며 이 연구는 그 노력들 중의 하나이다.

그러나 연구는 남북한의 역사가 하나”여야 한다는 전제에 끼워 맞추기 보다는 "하나"로 인식하는 것이 실제로 가능한지에 대한 본질적인 문제와 가능하다면 어떻게 가능한지를 밝히는 작업이 될 것이다. 1972년은 양체제의 근대화 과정에서 중요한 전환점인데 근대화(주2) 과정에서 역사 경험을 공유하는 두 지역의 다른 체제가 유사한 과정을 거치는가 아니면 각각의 체제 특성이 더욱 강하게 나타나는가를 밝히는 것이 연구의 막지막 목표이다.

 

2.연구의 문제점.

 

남한현대사 서술에서 북한

현대사에서 북한을 다루는 문제에 대한 견해는 크게 두가지이다

강만길은 고쳐 쓴 한국현대사서문에서 이 문제를 “8.15 이후의 우리 민족사를 남한사를 주로 하고 북한사를 일부 덧붙이는 방법이나 남한사 따로 쓰고 북한사 따로 써서 하나의 책으로 묶는 방법은 옳지 않다. 북지역의 역사적 전개가 각각 고유한 역사성를 가진다는 인식을 바탕으로 하고 그 위에서 남북한의 8 .15 이후사를 둘이 아닌 하나의 역사로 용해시켜 대등한 위치와 같은 분량으로 다루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아직은 학문내외적으로 그렇게 쓸 수 있는 조건에는 이르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또 그런 역사인식에서 8.15이후의 우리 역사를 볼 때 하나로 된 남북의 역사를 한국현대사로 이름짓기가 어렵다는 문제도 있다”(주3)라고 하면서, 해방직후와 한국전쟁에서 북한을 약간 다루고 있을 뿐이다.

이와 다르게 김인걸은 한국현대사 강의에서 "통일과 우리 사회의 민주적 발전이 거저 주어지는 것이 아닐뿐더러 여기에는 다양한 사회세력의 이해관계가 얽혀있고, 그것도 국제적 여건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어서 그 전망이 밝은 것만은 아니라는 점도 이제 국민들은 잘 알게 되었다.해방이후 반세기 동안 엄청난 대가를 치르고야 얻게 된 이 소박한 상식은 그렇지만 아직 시민권을 확보하지 못하고 있는 듯하다. 이러한 현실은 국민들이 과거 분단체제하의 폭압정치가 빚어낸 공포나 관제이데올로기의 세례로부터 완전히 자유롭지 못하다는 데서 비롯된 것이기도 하지만, 우리 자신 그 상식을 뒷받침랄 만한 구체적 증거를 확보하여 진실을 드러낼 힘을 갖추지 못한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그 힘은) 모든 편견과 경직된 관념에서 벗어나 진실을 밝히는 작업으로부터 나온다. 그 과정에서 주어진 조건에 대한 객관적 인식을 높이고, 보다 밝은 세상, 보다 나은 인간적 삶을 위한 노력을 경주할 때 힘이 붙는다. 이때 문제를 정확히 파악하는 것이 일차적 과제이지만, 주어진 과제를 어떻게 풀어가야 할지에 대한 물음이 동반되어야"(주4)라고 밝히고 북한과 통일문제를 각각 독립된 장으로 다루고 있다

그러나 양자가 모두 냉전 이데올로기에 벗어난 객관적인 한국사 인식이 필요하며 그중 핵심적인 문제가 역사서술에서 북한 다루는 것임에는 일치하고 있다. 단지 지금 다룰 수 있는가 없는가(혹은 다루어야만 하는가 미뤄야 하느가)에 대한 입장의 차이가 있다.

두가지 입장이 갖는 공통점은 "한반도의 현대사는 불완전하다"는 것이다. 강만길은 북한사가 빠짐으로 인해서 결과적으로 전반적인 인식이 불가능하게 되었고 김인걸은 북한 자료와 비중의 상대적 소략과 자료의 나열, 평가의 부재로 인한 한계가 있다. 그러나 이런 견해들에 대한 판단은 그 자체가 역사적인 문제이므로 지금 현재로는 판단을 유보하고자 한다. 이 문제는 연구자들의 노력과 정치 상황의 변화에 의해 해결되어 갈 것이다.

 

방법론

1977년 안병영의 북한 연구의 방법론〉(주5)이라는 논문에서 비교공산주의 연구를 위해 미국학계에서 개발한 다양한 접근법을 제시하였다. 1988년 송두율의북한사회를 어떻게 볼 것인가〉(주6)라는 논문이 나온 이후 연구방법론에 있어서 내재적 방법론과 외재적방법론자들 사이에서 북한연구의 올바른 방법에 대한 논의가 진행되었다. 이 문제는 1980년대말의 주체사상논쟁으로 전화됐으며 1990년대 초반 사회주의권 붕괴 이후 북한 사회주의 정권의 존속여부로 인해 재차 논의 되었다.

방법론이 논쟁의 또다른 핵심이 된 이유는 북한문제를 다루는 사료와 논문들은 그 편차가 너무 크기 때문이다. 하나의 사회, 동일한 사건들에 대한 큰 편차의 평가들은 '연구자가 객관적인 입장을 어떻게 취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부터 하게되었고 '대상에 대한 객관적 인식을 위한 자신의 존재조건'까지 재검토하도록 요구했다. 

남한에 살고 있는 연구자인 "나"는 현재 북한의 내부에 있는가 외부에 있는가?

북한을 포함한 전체한국사에서 연구자인 "나"는 내부에 있으나 대립되는 양 체제 중에서 다른 한 체제 속해 있다는 점에서 "나"는 외부에 있다. 남북한에 대한 비교연구에 있어서 자신의 존재조건이 연구에 미칠 영향을 정확히 판단할 필요가 있으며 이것은 어떤 방법론을 채택하여 연구하는 것이 객관적인가하는 물음에 앞서 확인해야 할 문제였다.

방법론에 대해서는 아래에서 좀 더 상세히 다룰 것이다.

 

연구자와 자료(주7)

남북한에 대한 연구는 방법론 문제에서 밝혔듯이 연구자들 사이의 시각차이가 큰 것과 함께 글들이 학술적이라는 보다는 정치적이다. 특히 북한문제에서는 일방적인 찬양이나 매도라는 양극단의 형태가 많다. 최근에 역사 연구자들에 의한 저술이 과거에 비해서 많아졌으나 남북한의 6070년대에 대한 논문들 중의 많은 수가 비역사학자들에 의해 저술되었다. 연구자들 이외에도 기행문, 고발, 폭로, 찬양 등의 개인적인 감정을 담은 글들이 있다. 문제는 이런 글들을 어느 정도 참고해야 할 지에 대한 결론을 내리기가 어렵다역사관련 논문으로 현대사를 다룬 글들이 적고 개설적인 수준이다.

 

주제와 내용

연구의 목적을 밝히기 위해 검토해할 내용을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

1972년 체제(유신체제와 사회주의신헌법체제:이하 신헌법체제)의 등장배경(국내국외)과 성립

-당시 통일정책(7.4남북공동성명등)과 체제강화정책의 상관관계

-1972년 이전의 통일정책 및 체제강화 정책의 관계

-동일지역내 두 개의 지방정권 지배집단의 경쟁과 공존의 문제:(미소냉전체제에 대한 적대적 동지관계라는 해석이 한반도에서 유효한가의 문제)

-세계정치정세(중소대결, 중미국교정상화, 월남통일, 미소화해, 미국의 제3세계전략의 변화 등)의 변화와 한반도

근대화 과정에서 남북한의 차이점과유사점

-식민지 반봉건사회의 해체과정과 근대국가건설노선 및 그 운영

-자본주의적 발전조선과 비자본주의적(혹은 반제국주의적)발전노선의 비교

-스탈린식 공업화와 로스토우식 공업화의 남북한에서 전개과정

남북한 지배집단 정권수립과 통치권 행사에 대한 양 지역 민중들의 대응.

3세계 권위주의 체제와 비교: 독자적인가 일반적인 표현인가?

각체제수립의 모델검토(소련중국스페인프랑스등)(주8)

 

비평 : 이상이 지금까지 관련된 글들을 읽으면서 정리한 주제와 관련해서 검토해야할 내용이다. 내용이 방대하여 주제의 성격이 남북체제에 대한 전반적인 검토로 확대되었다. 역사 논문으로서 그 성격이 불명확하게 되었고 하나의 논문에서 깊이 있게 다룰 수 없게 되었다. 각 부분에 대한 대략적인 서술은 논문을 연표와 교과서를 베끼는 것으로 만들 우려가 있다. 깊이 있게 다룰 경우 해석상의 오류와 편향을 피하기 어렵고 내용의 방대함으로 논문이라기 보다는 책이 될 것이다. 범위를 주제와 내용의 성격에 대한 전반적인 재검토가 필요하다.

 

3. 연구방법론

연구자는 그 학문이 사용하는 방법론개념 및 이론들에 대한 비판적인 자의식을 필요로 한다. 왜냐하면 학문연구에 사용되는 방법론개념, 이론들은 외부세계를 단순히 중립적으로 투명하고 왜곡없이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 학문 주체의 주관적인 입장과 상태를 일정하게 반영하고 있고 바로 이러한 속성이 대상에 대한 관찰자의 이해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1980년대 이전까지 남한에서는 적대의식과 반공이데올로기에 의해 채색된 대부분의 북한 연구들은, 의식적이건 무의식적이건, 북한체제의 부정적인 측면을 확대강조하고 긍정적인 측면은 무시 왜곡함으로써 북한체제에 대한 객관적인 이해를 방해했다. 기존의 방법론에 반발하여 1980년대 후반부터 내재적 접근법이 대두하였다. 송두율강정구이종석 등의 내재적 접근론자들은 기존의 접근법들인 전체주의 이론산업사회론에 근거한 수렴이론 등이 사회주의를 으로부터, 곧 자본주의나 자유민주주의에 입각한 가치나 척도에 따라 분석하기 때문에 근본적인 결함이 있다고 강력하게 비판하면서 사회주의 사회를 으로부터그 사회의 이념과 논리에 따라 분석하자는 내재적접근법을 주장하였다.

이러한 내재적 접근법에 대하여 강정인은 내재적 접근론자들이 외재적 접근법 및 내재적 접근법에 대한 편협한 이해, 북한체제의 긍정적인 측면을 부각시키는 논리의 일방성, 북한 체제에 대한 비판적 태도의 회피 또는 결여(주9), 사회주의권 붕괴와 변혁방향을 설명하는데 따른 내재적 접근법의 무력성등의 비판을 하면서 대상의 정확한 인식을 위해서 외재적 방법론은 필요하며 사회현상을 두 입장에서 동시에 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주10)

송두율은 내재적 접근법 비판에 대한 반론에서 외재적 방법론이 은연중에 외재적=보편적=서구적이라는 등식에 빠져 있음을 비판하며 북한 사회에 대한 내재적접근은 남한사회에 대한 동등한 수준에서의 내재적 접근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그는 내재적(immanent)’이라는 뜻은 우리 인식이 경험에 의거하고 있다는 점을 우선 강조하는 것이며 내재적의 반대말은 외재적(extemal)이 아니라 선험적(transzendental)'이며 북한 사회의 내재적접근은 북한 사회주의가 스스로 제시한 이념경험의 긴장관계를 드러내 보일 수 밖에 없으며 남북한 사회에 대한 수미일관된 내재적접근은 경우에 따라서 외재적척도의 자의성을 배제함은 물론 사회과학적 논리와 방법의 일관성을 보여 준다고 주장한다.(주11)

김연철은 이러한 일련의 논쟁이 연구방법의 논쟁이기보다는 인식의 방법에 대한 논쟁임을 지적하였다. 그는 모든 관찰자는 외부에 있으며 문제는 관찰방법이며, 여기서 행위자의 이념가치동기목표를 이해하고 해석한다는 것과 방법을 갖고 관찰한다는 것 사이에는 대립적인 측면보다 보완적인 측면이 많음을 지적했다. 또한 북한 연구의 문제점으로 다른 현실사회주의권 국가와는 달리 제한된 범위 내에서도 연구자들의 직접적인 연구가 불가능하다는 것과 북한 연구자들의 북한에 대한 경험이 북한 공식 출판물 뿐 임을 지적한다.(주12) 그는 북한연구에 있어서 이러한 경험 제약을 극복할 대안으로서 경험비판을 제안한다.(주13)

이런 일련의 논쟁은 우리의 남북한 연구가 여전히 초보적인 단계이며 연구자들 스스로가 정치상황의 한계에 매어 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역사의 실체로서 북한에 대해서 객관적인 인식을 갖기위한 학문적인 노력은 더욱 깊어지고 있다.

 

4.남북한 헌법에 대한 분석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대한민국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사회주의헌법(1972.12.27) 11149

헌법개정안 공고에 대한 대통령 담화 및 동제안 이유서(1972.10.27)

막스-레닌주의를 우리나라의 현실에 창조적으로 적용한 주체사상을 자기 활동의 지도적 지침(4)

민주주의의 한국적 토착화를 기한다

․…대안의 사업체계와 새로운 농업지도체계에 의하여 나라의 경제를 지도 관리한다(30) 경제건설을 다그치고 인민생활을 끊임없이 높이며 국방력을 강화할 수 있도록 인민경제 발전계획을 작성 실행한다(31)

정치, 경제, 사회, 문화등 모든 면에서 안정을 유지하고 번영의 기저를 확고히 하였으며

새마을 운동을 국가시책의 우선 과업으로 정하여

․…최고인민회의와 지방 각급 인민위원회를 통해 주권을 행사(7)

․…집단주의 원칙을 기초(49)

국민의 기본권을 우리 나라 실정에 알맞게 최대한 보장하였고

국가는 내외 적대분자들의 파괴 책동으로부터 사회주의 제도를 혁명화노동계급화한다.(11)

조국의 평화적 통일이라는 역사적 사명완수를 지향

전화의 재발을 미연에 방지하고 평화로 조국통일의 길을 모색

주석은 국가의 수반이며국가주권를 대표한다(89)종앙인민위원회를 직접 지도(91)정무원회의를 소집하고 지도(92). 주석은 최고인민회의에서 선거(90)한다.

대통령은 통일주체 국민회의의 대법원에 의한 간접선거 법관과 국회의원13에 대한 임명권 장악 국정 감사권 폐지. 중요정책을 국민투표로 합법화

*북한의 사회주의 헌법 조문과 남한의 헌법개정안 공고에 대한 대통령 담화 및 동제안 이유서는 비교의 격이 맞지 않으나 헌법 원문을 구하지 못해서 모두 한 책한국현대사강의에서 재인용했음.

*‘대통령 특별선언 및 동 공약 계엄포고 제1(1972. 10. 27)에서 인용한 것임

 

북한 신헌법의 특징은 노동당의 지위를 명시하였고 사회주의적 소유제도를 확립하였고 주체사상이 헌법규범화 되었으며 국가 주석제도를 도입하여 그 권한을 강화하였다.(주14) 유신헌법의 특징은 대통령이 중요정책을 주민투표로 합법화 시켰고 통일주체국민회의가 대통령를 선거하며 국회의원13 를 대통령이 추천하며 법관임명권을 대통령이 갖으며 대법원의 위헌 판결권을 헌법위원회에 귀속시켰다. 구속적부심제를 폐지하고 자백만으로 처벌이 가능하게 되었고 긴급조치권을 대통령이 갖게 되었다.(주15)

양 헌법은 표현방식의 차이가 있으나 대통령(주석)의 권한을 절대화시켰다는 공통점이 있다. 최고권력자의 선출을 간선제로 하였다.(주16) 중요정책의 국민투표제와 지방인민위원회를 통한 주권의 행사 등의 표현으로 형식적 민주주의가 확대된 것처럼 보이게 하였다. 자신들 체제의 존재목적으로 통일을 말하고 있다.(:조국의 평화적 통일, :온 사회를 혁명화노동계급화 한다사법부에 대한 부분은 살펴보면 북한은 1956년 종파투쟁(주17) 이후 사법부에 대한 행정부의 우위가 확보되었으며(주18) 유신체제에서는 이때 그 우위를 법적으로 확인하려 하였다 .북한의 신헌법체제는 50년대 이후 권력투쟁의 결과물로서 김일성의 권력독점을 확인하는 것으로 유신체제는 박정희의 권력 독점을 위해 만들어 졌다는 차이가 있다.

참고문헌

강만길, 고쳐 쓴 한국현대사, 창작과 비평사, 1994

김인걸 외, 한국현대사강의,돌베개, 1998

임영태, 대한민국 50년사, 들녁, 1994

한국현대사연구회 현대사 연구반, 한국현대사2,3,4, 풀빛, 1991

중앙일보특별취재본부, 실록 박정희중앙 M&B, 1998

역사문제연구소, 역사비평,역사비평사

최승화 외, 북한개론, 을유문화사, 1990

이종석, 조선로동당연구, 역사비평사, 1995.

안병영, 현대공산주의연구, 한길사, 1982.

(주) --------------------------------------------------------------------------------------------------

1. 중공업 중심의 경제개발, 군부 중심의 권력운용, 대외 자주화 노력, 북한에서의 남로당세력 제거와 박정희의 이북출신 군인맥의 척결 등

2. 박정희는 자신의 집권에 대한 정당성으로 사회적합의였다. 4.19의 민주화 개념을 대신해서 근대화를 제시했다. 여기서는 산업사회, 탈봉건사회를 향한 일련의 과정들에 대한 총칭으로 사용한다.

3. 강만길,고쳐 쓴 한국현대사, 창작과 비평, 1994.

4. 김인걸 외 편저, 한국현대사강의, 돌베개, 1998.

5. 안병영, 현대공산주의연구, 한길사, 1982.

6. 송두율, 북한사회를 어떻게 볼 것인가, 사회와 사상, 198812월호.

7. 사료와 논문의 문제는 가장 중요하지만 생략했다. 지금까지 확인된 논문목록과 사료의 목록만으로 그 양이 대단히 많은데 아직까지는 제대로 구하지 못했다. 지금까지 본 글들은 학교와 시중에서 구할 수있는것들에 대한 검토하였고 현재까지 출판된 중요자료들에 대한 검토후에 자료의 문제는 말 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여기에서는 이문제를 생략했다.

8. 신헌법의 정치활동 규범들의 하나인 군중노선은 북한 당국의 공식적인 주장과는 다르게 중국의 마오저뚱이 먼저 주장하고 문화혁명 시대에 실천한 것이며 유신체제의 구상자들의 대통령의 비상대권의 필요를 프랑스 제5공화국 헌법 제 16조의 모델을 빌어서 강조했다.

김민배, 유신헌법과 긴급조치〉《역사비평30, 역사비평사, 1995년 가을호

9. 이종석은 이에 대하여 진보적인 북한연구자들이 북한에 대한 비판적인 언명이 정치권력에 의해 북한 혐오증을 확대재생산하는데 이용될 소지가 크다는 이유가 북한비판을 회피하는 이유라고 밝혔다.

이종석, 북한연구방법론, 비판과 대안, 역사비평1990년 가을호, 역사비평사.

10. 냉전구조의 포로적인 시각에서 보면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차이가 대단한 것 같지만, 장구한 역사의 관점에서 보면 산업사회와 봉건사회(농업사회)의 차별성이 더욱 부각되는 것이 당연하다. 그러므로 연구자의 연구동기와 연구주제에 따라서 자본주의와 사회의 차별성에 크게 관심을 가질 수도 있겠지만, 이와 반대로 산업사회 또는 근대사회로서 양자의 공통성에 관심을 가지면 연구하는 접근법 역시 적절한 접근법이다. 앨빈 토플러의 3의 물결, 다니엘 벨의 탈산업사회이론, 정보사회론은 이러한 이론적 전제에 입각해 있다.

강정인, 북한연구 방법에 대한 새로운 제언〉《역사비평26, 역사비평사, 1994년 가을호

11. 송두율, 북한연구에서의 내재적방법재론〉《역사비평28, 역사비평, 1995년

12. 공식적인 서술은 현실을 반영할 뿐이지 현실 그 자체는 아니다. 연구자의 인식대상은 북한의 현실이지 공식 문헌의 서술은 아니다. 역사적 사건에 대한 사후적 성격 규정의 일방성을 비판적으로 분석하지 않는다면, 이는 행위자 진술에 주석을 다는 행위이다. 연자들의 일부가 주석을 다는 행위’(어떤이는 요약, 어떤이는 치장)를 연구라고 착각하고 있는 현실

김연철, 북한연구의 이데올로기적 편향 극복〉《역사비평29,역사비평사, 1995년 여름

13. 그는 공간문헌의 은유성, 간행시기별 서술의 차이, 정기간행물 등에서의 누락탈락삭제의 의미분석 등을 경험인식의 불안정성의 극복 대안으로 제시하고 있다.

김연철, 위의 글

14. 최승화, 헌법과 통치구조〉《북한개론, 을유문화사, 1990.

15. 류정임, 유신체제의 성립과 전개〉《한국현대사3, 풀빛, 1991.

16. 통일주체국민회의와 최고인민회의의 위상은 다르다. 전자는 대통령 선거인단의 성격이 강하고 후자는 원래가 대의기관이다. 그러나 최고인민회의에 출마할 사람의 선택권을 노동다이 독점하고 있다는 점에서 최고 권력자의 영구집권 의지를 반영하는 기구라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다.

17. ‘8월 종파라고 불리는 사건이다. 이종석은 이 투쟁이 권력투쟁의 영역에만 머물지 않고 사상투쟁과 경제건설사업에 연계되면서 추진된 점을 주목하고 김일성 중심의 단일지도체계를 확립하는 계기로 작용하였으며, 이것이 당내 정치과정의 역동성 탈각과 경직화를 낳은 결정적인 계기로 보고 있다.

이종석, 조선로동당연구, 역사비평사, 1995.

18. 이종석은 1950년대를 북한에서 사회주의주체사상유일지도체계 등 오늘의 북사 사회를 대표하는 중요한 특징들이 형성된 시로 보았다.

이종석, 북한의 전후복구건설과 반종파투쟁〉《한국현대사2, 풀빛, 1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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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시 인구증가, 일자리증가

시사 논단

 

이번 순서는 시사 논단입니다.

오늘은 진주참여연대 심인경 사무차장을 연결하겠습니다.

 

( 전화연결 )

> 심 차장님, 안녕하십니까, 오늘 어떤 내용입니까?

 

오늘은 진주시의 인구증가와 일자리 증가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 진주시에서 발표한 인구증가와 일자리 증가의 내용은 무엇입니까?

 

진주시는 지난 21일 진주소식 제17호에서 진주시의 인구가 26개월만에 5400여명 증가했으며 8000여개의 일자를 창출했다고 발표했습니다. 인구증가는 다양한 복지시책이 인구유입에 기여했으며 일자리창출은 혁신도시와 82개의 유망기업의 유치에 따른 것으로 진주시의 계획적이고 적극적인 행정지원 및 집중적인 투자유치활동의 성과라고 합니다. 또한 10년 이내에 50만인구시대가 도래할 것이라는 장밋빛 전망을 내놨습니다.

 

> 진주시 인구증가의 특이점은 무엇입니까?

 

진주시의 발표에 따르면 진주시의 인구는 2007333256명까지 줄었다가 이후 꾸준히 늘어났으며 2010년 이후 인구 증가폭이 더욱 늘어난 것으로 나옵니다. 그러나 통계청의 국가통계포탈에 나오는 지방지표를 보면 2011년 진주시의 인구증가율은 경남의 8개시 중에 6번째입니다. 인구가 줄어든 밀양시를 제외하고 인구가 증가한 경남의 7개 시 중에서 7위인 통영시와는 0.02%차이가 날뿐입니다. 통계청의 자료에 따르면 2008년부터 2011년까지 진주시의 인구증가율은 경남의 8개시들 중에 6-7위로 최하위 수준이며 합계출산율은 인구가 줄어드는 밀양시를 제외하면 꼴찌입니다. 이러한 자료로 볼 때, 진주시에서 주장하는 진주시의 특수한 복지시책이 인구증가에 기여했다는 주장은 무리가 있으며 진주시는 경남도내 다른 시에 비하여 왜 인구증가율이 낮은지에 대해서 고민해야 합니다.

 

> 진주시는 일자리가 늘어났고 이것이 인구증가에 증가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 평가하고 있습니다. 직접적인 연관이 있습니까?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2011년에 비해 2012년에 취업자의 수가 6500명 늘어났고 26개월간 인구는 5369명이 늘었습니다. 통계기간의 차이가 있습니다만 둘 사이에 일정한 관계가 있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일자리증가와 인구증가가 뚜렷하게 일치하는 것은 아닙니다. 진주시의 자체 통계를 보면 최근 5년간 일자리가 가장 많이 늘어난 해는 2009년으로 전년도 대비 7729명이 더 취업을 했습니다. 그러나 2009년에 주민등록상 늘어난 인구는 502명에 불과합니다. 일자리증가와 인구증가는 서로 영향을 주겠지만 진주시의 통계자료로 볼 때, 진주시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그 효과가 단기간에 그대로 드러나는 것은 아니라고 보여집니다.

 

> 진주 경제의 활성화를 위해서 진주시에 더 노력해야 할 부분은 무엇입니까?

 

발표한 자료의 인과관계에 문제점들은 있지만 진주시는 기업을 유치하기 위해서 노력했고 양질의 새로운 일자리를 만들기 위해서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기존에 진주시에 있는 기업들의 유지라는 측면에서는 매우 걱정스러운 상황을 만들어왔습니다. 지난 20114월 아트원제지 진주공장이 폐쇄될 때도 기업체의 말만 믿고 아무런 대책을 세우지 않았고 공장폐쇄를 막고자하는 노동자들이 시청을 찾아갔을 때도 기업유치를 위한 계획이나 예산은 편성되어 있으나 지역 공장 폐쇄 등에 대한 대책은 없다고 말을 했습니다. 그리고 지금 진주의료원이 폐업 위기에 놓여있지만 관여할 사항이 아니다” “경남도와 협의중이다는 답변만 있지 뚜렷한 대책은 없습니다. 진주시민들은 대동중공업의 이전으로 인하여 지역경제가 얼마나 피폐해졌는지 기억하고 있습니다. 진주시가 새로운 좋은 기업의 유치를 위해서 노력하는 것도 중요하겠으나 진주시에 현재 있는 기업들과 일자리들에도 더 많은 관심을 보여주길 부탁드립니다.

> 심 차장님, 오늘 말씀 감사합니다.

지금까지 진주참여연대 심인경 차장의 논단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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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기생 논개

역사 2014. 9. 3. 13:32

진주기생 논개

 

  ------------ 참고 사진, 사료들은 다음에 시간나면 올리겠음. 언제 시간날지 모림. --------------------

논개만큼 유명하면서 논개만큼 그 삶을 알 수 없는 역사인물을 찾기도 쉽지 않다. 논개는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으나 그 대부분이 소설에 가깝다. 그녀가 언제 태어나서 몇 살에 죽었으며 그 부모가 누구이며 고향은 어디인지, 어떻게 살았는지 전혀 알 수 없다. 그녀에 대한 증언은 유몽인의 어우야담에 전언으로 나오는데 그녀의 죽음만을 알 수 있을 뿐이다. 남겨진 자료가 없기 때문에 그녀에 대한 연구는 매우 미흡하다. 그녀에 대한 연구논문보다 그녀에 대한 소설(또는 상상력의 결과물에 대한 연구)이 더 많은 역사인물이 논개이다.

논개에 대한 이야기들 중 대부분이 허구인 상황에 대해서 박노자는 그의 논문 임진왜란과 의기(義妓)전승전쟁, 도덕, 여성에서 논개의 신격화라 표현했다. 박노자가 신격화라 표현할 만큼 그녀의 삶은 알려진 것이 없으나 그 죽음은 충격적이라 많은 사람들의 상상력을 자극해 왔다. 이 글도 논개의 삶을 명쾌하게 밝힐 수는 없으며 그녀가 죽음을 통해서 표현하려 했던 바를 찾아보려 한다.

 

논개의 죽음이 진주 외부에 최초로 알려진 것은 유몽인에 의해서다. 유몽인은 임진왜란 당시 세자였던 광해군에 의해 삼도순안어사’(1593. 충청, 전라, 경상도를 돌아다니며 살피는 어사)로 임명되어 진주에 왔고 이 때 논개의 이야기를 들었다. 유몽인은 논개의 이야기를 동국신속삼강행실도”(1617. 충신, 효자, 열녀에 대해 기록한 책)에 넣고자 했으나 관기를 충신이나 열녀 부문에 넣을 수 없다는 반대의견 때문에 국가의 공식 기록에 논개를 넣을 수 없었다. 논개는 음탕한 창기이기 때문에 국가로부터 외면 받았고 이에 대해 유몽인은 거룩하지 않으면 충성이 아니냐라고 물으며 그녀의 이야기를 어우야담’(1621)에 남긴다.

신분이 천한 것들은 숭고할 수 없기에 그 죽음도 국가로부터 인정받지 못하고 야담이 되었고 후대의 사람들은 그것이 실제로 있었던 일이냐며 반문하거나 신격화하는 이야기들을 만들어냈다.

 

유몽인 이후 논개에 대한 기록은 1629년 정대륭이 논개가 순국한 바위를 의암이라고 쓴 것과 1651년 오두인이 의암기를 쓴 것이 전부다. 논개의 죽음이 다시 논쟁거리가 된 것은 그녀가 죽고 128년이 지난 1721년이다.

 

1721년 경상우병사로 진주에 부임한 최진한은 진주 사람들의 하소연을 듣고 비변사로 논개를 포상해 달라는 보고를 한다. 이에 비변사는 왕에게 보고하고 이듬해(1722)근거할 만한 기록을 보내라고 한다. 그러나 130년전에 죽은 천한 기생의 기록은 찾을 수 없었기 때문에 진주사람들은 유몽인의 증언과 유사한 논개에 대한 이야기를 돌에 새겨 올려 보냈다.(의암사적비)

이에 정부는 논개의 죽음이 거룩하다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이를 보답할 것을 알리며 자손을 찾아서, 별도로 부역을 면제시켜 주고 이제까지 하지 못했던 나라의 특별한 은전을 보이도록 하라는 지시를 내린다. 경상우병영은 정부의 지시를 이행하기 위해서 관할하는 관청에 논개의 자손을 찾아보라는 공문을 보내지만 찾을 수 없다라는 답변만 받았고 이 보고에 대해서 정부는 아무런 답이 없었다. 이때 논개는 공문에 처음으로 음탕한 창기’, ‘관기가 아닌 의기로 기록되었으나 그녀는 다시 잊혀졌다. 임금이 바뀌자 최진한은 다시 상소를 올렸지만 이에 대한 영조의 답변은 쌀쌀했다. “처음에 구별을 둔 것에 반드시 까닭이 있었을 터이다. 야담에 적혔으나 어찌 믿을 수 있겠는가? 또 백여 년이나 지난 일이라 가볍게 처리할 수 없다.”

 

가볍게바뀔 수 없었던 논개에 대한 영조의 입장이 바뀐 것은 이십년이 다 되어가는 1740년이다. 경상우병사 남덕하가 영조에게 장계를 올려 의기에게 사당을 세워 포상하기를 청하여 마침내 허락을 받았다. 논개는 죽은 지 147년만에 국가로부터 그 공적을 인정을 받았다. 이를 주도했던 경상우병사 남덕하가 이인좌의 반란을 진압한 일등공신이었기에 가능했다는 주장은 너무도 서글픈 또 다른 역사의 모습이다.

 

한 세기를 훌쩍 뛰어넘는 그 오랜 시간동안 논개는 잊혀지지 않았을까? 제대로 된 역사기록도 없고 정부도 인정하지 않았고 자식도 일가친척도 없는 그녀는 어떻게 사람들의 기억 속에 남아 있었을까?

 

논개를 기리는 제사는 1651년에 이미 연례행사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오두인의 기록에 따르면 매년 629, 진주성이 함락된 날, 진주사람들은 강가에 제단을 만들고 의로운 넋에 제사를 올렸다. 이 제사는 영조대에 의기사가 만들어지고 봄, 가을에 제사를 올리게 된 이후에도 계속 지냈다. 광복 후 논개 제사를 본, 시인 정지용은 호화 삼엄한 예술제”, “어린 기녀들이 논개제에서부터 배우고 체득하는 서럽고도 아름다운 전통이라 표현했다.

 

왜 진주사람들은 침략군 한 명(논개소이영지論介笑而迎之 왜장유이인지倭將誘而引之)을 껴안고 강물에 투신한 음탕한 창녀를 수 백년 동안 기억하기 위해서 노력했을까? 임진왜란 때, 진주에서 죽은 숭고하고 거룩한 자들이 수십 수백이며 그들보다 덜 숭고하지만 음탕한 창기보다는 비천하지 않은 수만명의 양민들이 죽었다. 촉석루 앞 남강은 투신 사람들의 시체로 강물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그 많은 사람들 중에 왜 하필 음탕한 기생 논개를 수 백년 동안 기억하려 노력했을까?

 

어떤 사람은 진주사람들의 기억과 유몽인의 기록에 착오가 있었을 수도 있다고 주장한다. 어떤 이들은 꾸며진 것이라 주장한다.

 

논개에 대한 대부분의 이야기는 꾸며진 것이 맞다. 1722년 공문을 통해서 국가기관을 동원하여 찾아보려 노력을 했으나 등장하지 않았던 그녀의 자손은 1740년 의기로 공식 인정받은 10년 후인 1750년에 처음 등장하게 된다. 이 때 논개는 진주성에 죽은 최경회의 첩이 된다. 논개는 음탕한 창기에서 첩실이지만 사대부의 부인으로 신분이 상승한다. 반세기 후에는 고향도 갖게 된다. 1799년 발간된 호남절의록에 장수 사람으로 등장한다. 이후 다시 반세기 정도 지난 1846년 장수현감 정주석은 촉석의기논개생장향수명비를 세워 논개의 고향을 장수로 공식화한다. 1872년에는 장수현읍지를 통해서 장수현 임현내면 풍천마을이 논개의 고향으로 밝혀진다. 그리고 다시 백년이 흘러 1977년 함양군은 의랑 논개를 펴내며 함양군 서상면 금당리 방지마을에 논개의 무덤이 있다고 밝힌다.

 

국가로부터 의기로 인정받은 이후에 등장한 경천동지할 역사발굴의 결과들 덕분에 논개는 천한 기생에서 거룩한 신화가 되었다.

 

그러나 우리가 논개의 죽음을 이해하기 위해 봐야 할 것은 그녀에 대한 신화가 만들어지 지기 시작한 이후가 아니라 그 앞이다. “의기 논개가 되기 이전 한 세기가 넘게 진주의 관기들에 의해서 이루어진 그녀의 제사에 대해 생각해 보자.

 

전태일은 노동자의 인간다운 삶을 보장하라며 죽었지만 전국의 공장 중 그의 기일에 제사는커녕 묵념을 올리는 사업장을 찾아보기 어렵다. 관기(관청에 소속된 기생)는 현재의 노동자들보다 수백배는 더 어려운 처지에 있었고 가장 신분예속이 심했다. “백정은 기생들도 안받는다라는 말 속에 이 두 신분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어떠했는지 알 수 있다. 변사또가 제일 먼저 한 일이 관기들 확인이었다.(점고)

 

그러나 논개의 제사는 관기들이 주최했다. 기생들이 기생의 제사를 위해서 강가에 큰 제단을 쌓고 아름다운 가무를 추고 거지들과 빈농들에게 음식을 나눠줬다. 그녀의 죽음이 실제보다 과장된 것이라면 그런 일이 가능했을까? 필자가 초등학교 다니던 1980년대 초반만 해도 629기생 제삿날이 되면 시내의 공기조차 무거워졌고 외출을 금지 당했다. 남강가에서 항상 놀았던 그 초딩은 누구 인지 모르지만 밖에 놀러 나가지도 못하게 한다고 죽은 사람 욕을 해대며 방바닥에 화풀이를 했다.

 

2007년 박노자의 논문이 논개 이야기가 만들어진 것으로 진주에 알려지고 이에 대응하기 위해 진주의 유력인사들이 모였다. 그 자리에서 나이 지긋하신 진주 사족의 후예는 우리 어르신들이 할 일이 없서 기생년 이야기나 만들고 다녔을까?”라는 입장을 밝혔다.(당시 필자가 서울에 가서 박노자를 만나 사실 확인을 해야 하는 임무를 맡았기에 그 자리에서 동네 어르신들의 여러 가지 이야기를 경청해야 했다.)

 

150년만에 국가로부터 죽음을 인정받은 논개의 이야기는 계속 확장되었고 논개가 죽은지 400년이 지났으나 그녀의 이야기는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그녀가 죽은지 400년만에 그녀의 무덤까지 발견되었으니 앞으로 50, 100년 후에 논개에 대한 새로운 무엇이 발견되더라도 그리 놀라운 것은 아니리라.

 

지금까지 만들어졌고 앞으로도 꾸준히 만들어질 논개에 대한 수많은 전설과 상상들은 그저 이야기꺼리일 뿐이다. 우리가 소설이 아닌 역사로서 논개에 대해 기억해야 할 것은 임진왜란을 겪었던 진주사람들이 논개의 죽음을 통해서 전달하고자 했던 것이 무엇일까 하는 것이다.

 

진주를 끝까지 지킬 것이라는 임금을 말을 믿고 7만명의 사람들이 진주성에 들어왔고 학살당했다. 권율이 지휘한 국왕의 군대는 일본군의 병력에 놀라 전라도로 철수했고 명나라의 군대는 일본군과 협상하며 진주를 포기했다. 10만의 침략자들에게 포위된 진주성은 10일을 싸웠으나 하늘조차 진주사람들을 버렸다. 큰 비로 활줄은 늘어지고 성벽은 큰 물살에 흘러내렸다.(1591년에 실시한 부실한 진주성 확장공사 때문에 성벽이 무너졌으나 당시 진주 사람들에게는 하늘이 버린 것으로 이해됐을지도 모른다.) 홍의장군 곽재우는 진주성을 비울 것을 주장하며 입성하지 않았고 방어를 책임진 장수들은 서로 헐뜯기 바빴다. 방어하는 장수들의 문제점을 지적한 늙은 기생은 목이 잘렸다.

 

참혹한 학살의 현장, 버림받은 자들의 대지에 7만명 중 가장 힘없고 천한 자에 속한 여성이 스스로의 삶을 결정하기 위해서 일어섰다. 일본의 지배자 토요토미 히데요시로부터 진주성에 살아있는 모든 것을 죽이라는 명령을 받은 학살자의 군대도 그녀가 위암(危巖, 논개 사후 의암義巖)걸어가는 길을 막지 못했다. 국왕의 대리자들로부터 받은 것은 술잔과 멸시와 정액뿐인 그녀가, 유몽인의 주장처럼 국왕에서 충성을 다하기 위한 목적으로 학살자와 함께 죽기 위해서 그 위험천만한 길을 걸어갔을까?

 

참혹한 전쟁을 겪은 사람들이 전쟁의 교훈을 잊지 않기 위해서 선택한 사람이 그들 중 가장 천한 자, “음탕한 창기 논개였다. 그들이 왜 그녀를 선택했는지 남아 있는 자료들이 없어서 알 수 없다. 논개는 자신의 죽음을 스스로 선택했다. 그녀의 선택은 인간이 스스로 존엄을 지키는데 필요한 것은 그의 나이, 직업, 지식, 재산, 신분이 아니라 것을 보여줬다. 논개는 숭고하고 거룩하지 않아도 모든 사람은 존중받을 가치가 있음을 그녀는 자신의 죽음으로 보여줬다.

 

사회로부터 거룩하고 존귀한 자로 대접받던 자들이 공동체를 앞장서서 지켜야 할 자신들의 임무를 방기하고 적들에게 끌려가 그 대단한 목숨을 연명하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팔 때, 공동체의 가장 미천한 음탕한 창기는 자신의 삶을 결정했다. 그것이 순국이라는 이름의 공동체를 위한 행동인지 참혹한 전쟁에 휩쓸려 어쩔 수 없이 선택한 것이든 그녀는 공동체의 적에게 타협하지 않는 결정을 내렸다.

 

그녀의 이 결정은 300년이 지나 진주 기생 산홍에게 이어졌다. 을사5적 이지용의 첩이 되어라는 요구에 대해 산홍은 첩은 비록 하찮은 기생이나 사람 구실을 하며 사는데 어찌 역적의 첩이 되겠습니까?”라고 답했다.

 

남강위에 떠 있는 의암은 오늘도 우리에게 묻는다.

너희는 사람 구실을 하고 있느냐?”

 

* 자료는 김수업의 논개”(2001, 지식산업사), 진주문화원의 논개사료조견표를 참조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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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의료원 폐업

 

시사 논단

 

이번 순서는 시사 논단입니다.

오늘은 진주참여연대 심인경 사무차장을 연결하겠습니다.

 

( 전화연결 )

> 심 차장님, 안녕하십니까, 오늘 어떤 내용입니까?

 

오늘은 경남도가 제시하고 있는 진주의료원의 폐업 이유에 대해서 짚어보는 시간을 가져보겠습니다.

 

> 경남도가 진주의료원을 폐업하기로 결정한 배경은 무엇입니까?

 

경남도는 진주의료원 폐업 배경으로 의료원의 첫째, 누적부채가 급증했고, 둘째, 의료수익 대비 인건비 비율이 높고, 셋째 진주지역 의료서비스 과잉으로 병상가동률이 저하돼 무수익 악순환이 계속되고 있으며, 넷째 의료원 직원들이 경영정상화를 뒷전으로 미뤄서 병원을 정상적으로 운영하기 힘들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주장들은 근거가 매우 취약한 것으로 문제가 많습니다.

 

> 경남도가 주장하는 페업 근거의 문제점은 무엇입니까?

 

첫째 부채를 말씀드리면 경남도는 진주의료원의 부채가 많아서 곧 파산할 것처럼 말하고 있습니다. 진주의료원의 부채는 279억원이고 부채비율은 66%입니다. 참고로 현대자동차의 부채는 75조원에 부채비율이 154%입니다.

둘째 경남도는 수익 대비 인건비 비율이 82.9%로 높고 초전동으로 이전후 150% 이상 인력이 증가해서 문제라고 합니다. 그러나 제주의료원은 인건비 비율이 101%이고 80%넘는 의료원들도 많습니다. 더구나 진주의료원 지난 6년간 임금동결을 해왔습니다. 인력이 많다는 것도 터무니 없는 이야기입니다. 의료원은 325병상에 의사 18, 직원이 320명입니다. 병상 숫자에서 292병상으로 비슷한 규모인 제일병원은 의사 34명에 직원이 400명입니다. 의사 정원을 늘려서 의료서비스 질을 높이고자 했으나 이를 못하게 막은 것은 경남도가 중심이 된 의료원 이사회입니다.

셋째 의료서비스 과잉문제인데요, 진주의료원은 신축이전 이후 어려운 상황에서도 병상가동율이 80%가 넘었습니다. 지난 8일 보건복지부의 발표에 따르면 경상대병원 응급센터는 환자가 많아서 병상이 부족하고 진주의료원 응급센터는 전국 상위 40%에 들어가는 우수한 기관입니다. 창원과 비교를 해서 과잉이라고 하는데 창원은 의료시설이 부족한 곳입니다.

 

> 경남도에서는 진주의료원의 공공성이 미흡하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사실인가요?

 

만약에 공공성이 미흡했다면 이는 관리감독기관인 경남도에 1차적인 책임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부분도 경남도의 주장과 다릅니다. 경남도는 227일 기준으로 진주의료원 입원환자 189명 중, 기초생활 수급자와 차상위계층이 17%에 불과하다고 말하고 있으나 진주시 전체 인구에서 이들이 차지 하는 비율은 3.6%에 불과합니다. 인구비율로 따졌을 때, 5배나 더 많습니다. 경남도는 진주의료원의 공공의료예산이 낮다고 주장하고 있으나 공공의료예산에 포함하고 있지 않는 포괄수과제 시범사업, 호스피스완화 의료센터 운영 등 다른 병원들에서 시행하지 않는 공공정책사업을 정부와 경남도의 지원없이 꾸준히 시행하고 있습니다.

경남도는 민간의료기관들이 공공의료를 시행할 수 있다고 하는데 경남도에서 민간병원들 중에 공공의료 수행기관으로 지정한 병원이 한군데도 없습니다.

 

> 그 동안 경남도가 진주의료원을 지원한 규모는 어느 정도인가요?

 

신축이전 비용 534억 중 113억을 부담했고 2010년에 1193백만원, 2011년에 136천만원, 2012년에 1242백만원을 지원했습니다. 경남도는 134백억이 넘는 부채를 갚기 위해서 진주의료원에 지출하는 10억원을 아끼겠답니다. 1년예산이 62천억원이 넘는 경남도가 10억여원의 예산을 아끼기 위해서 진주시민이 연간 15만여명이 이용하는 의료시설을 폐쇄하겠다고 합니다. 진주의료원은 현재 그 땅값만해도 경남도가 의료원신축을 위해 투자한 돈의 두 배가 넘습니다. 경남도는 진주시민의 생명과 재산을 강탈하려는 행동을 즉시 중단해야 합니다.

> 심 차장님, 오늘 말씀 감사합니다.

지금까지 진주참여연대 심인경 차장의 논단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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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가지

바람처럼 휩쓸고 지나가는 논쟁에 참가하지 않는 것이 정신건강에 이롭지만 이건 이야기해야겠다.

진보는 모르겠지만 좌파는 정치적인 면에서 싸가지 없어야 한다.
삶과 죽음이 오락가락하는 사람들과 피터지게 함께 하겠다는 사람들이 정치적인 면에서 이것저것 따지며 "예의", "싸가지" 운운하는 것은 스스로 허위의식에 가득차 있음을 증명하는 것일 뿐이다. 근래에 많이 봤지 않은가....

정치적인 측면, 정책적인 측면 외에 다른 부분에서 "예의"없음은 그것대로 비판받아야 한다.

이 나라의 많은 좌파 활동가와 정치인들은 머리 속에 "정치"만 들어 있어서 모든 것을 정치적으로 해석한다. 이것 자체로 틀린 것은 아니지만 이 나라의 대다수 사람들은 생활의 모든 것을 정치적으로 해석하지 않는다.

싸가지, 예의에 대한 우리 나라 좌파와 대중들간의 간극은 정치적인 것과 정치외적인 것에 대한 이해의 차이(해석의 차이)에서 발생한 것이다.

이런 차이가 발생한 이유는 여러 가지 있다. 좌파들 내부에서 토론이 부재했던 것, 주요 활동가들이 아직은 너무 어려서 인생 쓴 맛을 못 봤기 때문에 발생했던 것, 자신의 내용이 부실하니 외부적으로 날카롭게 반응했던 것 등 찾아보면 원인은 여러 가지이다.

사람 덜 된 것을 정파적인 특색, 사상적인 특색으로 몰아가는 덜 떨어진 애가 교수랍시고 논객이랍시고 껄떡대는 꼬라지 보니 이 나라가 어디쯤 와 있는지 알겠다.

조중동같은 노랑신문들과 한심한 방송들이야 먹고 살려고 그러는 것이라지만 지식인 푯말달고 전근대시대에나 유행했고 파시스트들이나 하는 짓거리하고 있으니 참 난감한 세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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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시 아파트형공장

 

시사 논단

 

이번 순서는 시사 논단입니다.

오늘은 진주참여연대 심인경 사무차장을 연결하겠습니다.

 

( 전화연결 )

> 심 차장님, 안녕하십니까, 오늘 어떤 내용입니까?

 

오늘은 2012년에 진주시의회에서 네 번이나 부결된 아파트형공장에 대해서 이야기 나누는 시간을 가져보겠습니다.

 

> 아파트형공장에 대해서 좀 더 자세히 알려주시죠.

 

3층 이상, 6개 이상의 공장이 집적된 건물을 아파트형 공장이라 하며 법정용어는 지식산업센터입니다.

아파트형 공장은 1979년 수도권 과밀 억제 권역 내에서 새로운 공장 건설이 어렵게 됨에 따라 1989년부터 도시형 중소기업의 입지수요가 높은 대도시 주변지역을 중심으로 건설되어 공급되고 있습니다.

초기에는 중소기업진흥공단이나 도시개발공사등 공공기관에 의해 공급되었으나 2000년대 이후 민간 건설이 대세를 이루었습니다.

20113월 현재 전국에 362개소(설립기준)가 건립되었는데 20089월 기준, 150개소에 건립이 된 것에 비교해 볼 때, 최근에 비약적인 증가세를 보이고 있고 수도권에 전체 83%가 집중되어 있습니다.

건설 목적은 크게 다섯 가지입니다. 첫번째는 공장부지를 확보하기 힘든 도시지역에서 중소기업을 위한 토지이용의 고도화, 두 번째는 주거지 주변에 남아 있는 중소규모 공장을 통합하여 도시환경 개선, 세 번째는 도시내의 소규모 무등록공장을 해소, 네 번째는 저소득층 소득창출, 다섯 번째는 중소기업의 경쟁력 제고입니다.

진주시는 현 이창희 진주시장의 공약사업으로 처음 제기되어 공론화되었는데 아파형공장은 시설 투자 절감, 집적 이익, 정보 교류, 작업 환경 개선 등의 효과를 가져올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입주업체 간 유기적 협력 시스템과 관리 체계가 미흡할 경우에는 오히려 도심공동화의 역기능이 있을 수 있습니다. 진주시는 망경동 구역사를 후보지로 지정했는데, 철도로 인하여 도심내 개발정체구역이었던 망경동 지역이 아파트형공장 사업이 실패할 경우, 더욱 심각한 상황에 처할 수도 있기 때문에 진주시에서 진행하고 있는 아파트형 공장사업에 대해서 우려하고 있습니다.

 

> 망경지역발전위원회에서 진주시의회의 아파형공장부지매입 부결에 항의하며 진주시의회에서 시위를 했던데 무엇이 문제인가요?

 

결론부터 말하면 타당성과 경비문제입니다. 작년에 저희 단체가 민선5기 중간평가를 위해서 조사한 바에 따르면 아파트형 공장 사업은 이창희 시장의 공약에서는 경비조달 문제가 구체적으로 다뤄지지 않았고 수도권을 중심으로 아파트형 공장이 급격히 확대되던 때였습니다. 당선 이후, 중소기업청의 공모사업이 있어서 진주시에서는 이에 지원을 했으나 7개 신청지역 중, 5개 광역시만 1차 대상지로 선정되었고 진주시와 같은 중소도시는 2차 사업대상지가 되었으나 광주, 대구등 1차 대상지가 사업포기를 고려하며 그 효율성에 의문이 제기되어서 2차사업은 계획이 중지된 것으로 보입니다. 이에 진주시는 1차 대상지 중에 포기하는 곳이 발생하면 다시 신청하여 국비를 확보한다는 계획을 세웠습니다.

진주시는 공모에 필요한 사업대상지역 토지매입을 위해서 그 경비를 의회에 요구했고 진주시 의회는 사업의 타당성과 경비 확보를 문제 삼았습니다.

강민아 진주시의회 기획경제위원장은 진주시에서 상평공단 대체지로 아파트형 공장은 정촌, 사봉 등 진주시 주변에 상평공단 대체 산업단지가 있어서 타당하지 않으며 어떤 아파트형 공장을 만들 것인지 명확하지 않아서 실패할 우려가 있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경비조달에 문제에 있어서 진주시에서 국비조달을 하겠다고 했으나 주무관청인 중소기업청은 아파트형 공장과 관련한 새로운 공모사업이 없으며 포기할 것이라고 알려진 대구는 지난해에 착공을 했기에 진주시의 주장이 타당하지 않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아파트형 공장에 대해서는 양쪽의 주장이 다르지만 진주시 의회도 구역사와 폐선부지에 대한 진주시의 매입에 찬성을 한다니 망경동 주민들께서 걱정을 조금 덜 하셔도 될 것 같습니다.

 

> ‘아파트형 공장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할까요?

진주시는 아파트형공장의 추진이유로 상평공단을 포함한 지역의 영세한 중소제조업체의 사업공간이 절실하다는 것을 들고 있습니다. 그러나 용역보고서는 지하1층 식품제조업, 지상2층 섬유품 제조업, 지상3층에 의료품제조업, 지상4층에서 7층까지 전문서비스업체, 8층은 사회적기업과 산학연계시설을 배치할 것을 제안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용역보고서의 수요조사업체 중에는 회계사무소, 사진관, 미용실, 빵집 등이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진주시의 현재 주장과 용역보고서, 용역보고서 내의 수요조사 업체들 사이에 일관성을 전혀 찾아볼 수 없습니다. 용역보고서에 따르면 이 업체들 중 70.5%가 아파트형공장에 입주자격이 있어도 입주하지 않겠다고 합니다. 2014년에서 완공예정인 2015년 사이에 예상되는 신규 수요 업체는 2곳에 불과합니다.

용영보고서는 그 내용에도 문제가 많습니다. 입주대상업체인 진주지역 4개 창업보육센터 입주기업 58개와 창업보육센터 졸업기업 177개에 대해 입주여부를 물은 내용이 없습니다. 보고서 204쪽에 설문조사를 한 200개업체 중 당장입주는 2%, 입주고려가 20%, 추이를 지켜보겠다는 기업이 7.5%로 나오는데 동일한 보고서 243쪽에서는 진주,사천지역 아파트형 공장 입주 대상업체는 3,722개이며 설문조사결과 전체의 37%가 입주의사를 갖고 있다고 나옵니다. 두 설문결과가 같은 것인지 다른 것인지 왜 차이가 나는지 설명도 없습니다. 아파트형공장 운영에 따른 부가가치는 말하고 있으나 진주시에서 운영할 경우 발생할 경상경비에 대한 내용이 없습니다.

진주시는 문제해결을 위해서 시민들이 납득할 수 있는 제대로된 계획서를 제출해야 합니다. 그리고 전문가와 관계자들과 협의를 거쳐 시민공청회 등을 통해서 의견을 모아야 합니다. 근거가 부실한 장밋빛 환상만 선전해서 주민들을 거리로 내모는 행동을 중지해야 합니다. 아파트형 공장의 예정부지인 구진주역사와 폐선부지의 활용은 망경동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진주도심을 재구성하는 매우 중요한 사업입니다.

이창희 진주시장의 공약 이행도 중요하겠으나 진주시의 미래를 위해 정치적인 입장을 떠나 힘과 지혜를 모아야 할 것입니다.

> 심 차장님, 오늘 말씀 감사합니다.

지금까지 진주참여연대 심인경 차장의 논단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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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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